역할

by 오늘을 살다

출장이 있어 조금 늦게 출근한다기에 오늘은 아침밥을 늦게 차려주었다.

빨리 나와 밥 먹으래도 뭘 하는지. 국도, 밥도 다 식은 후 나와서 식탁 앞에 앉으며

멀리서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불렀다.


- 자기 뭐해. 이쪽으로 와.

- 왜? 할 말 있어?

- 우리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잖아.

- 우리만큼 이야기 많이 하고 같이 많이 있는 사람들이 어딨어.

- 그래도 빨리 와.

- 그럼 내가 책 읽어줄게. 같이 있고 싶으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해.


읽고 있던 정여울 작가의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를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남편은 본인의 책장이 따로 있을 만큼 책이 많지만 99%가 전공과 관련된 책들이고, 나머지는 실용서이다. 에세이 책은 남편의 세상에선 무용한 물건에 속한다. 시간이 남아돌아도 결코 보지 않을.


좀 전에 읽었던 내용 중 들려주고 싶은 부분을 골라서 읽었다.


-'제대로 된 거리감을 획득하지 못해 실패하는 관계가 많다. 커플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모든 것을 공유하다 보면 문득 나만의 시간이나 공간을 갖고 싶어 져 상대방의 사랑이 소유욕이나 집착으로 느껴지곤 한다.'


자기 들으라고 읽는 거야. 잘 들어.


- 그런 책이 재밌어?

- 응 재밌어.

- 이해가 안가네..


집중 좀 하자.


- '처음으로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원룸을 얻었을 때, 엄마는 당당히 집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엄마, 그건 진짜 독립이 아니잖아. 엄마가 집 비밀번호를 알게 되면,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여기에 올 거고, 그러면 엄마는 청소를 해주거나 빨래를 해준다는 명복으로 나를 계속 통제하는 거잖아."'


- 나는 다른 사람들 생각에 대해선 하나도 안 궁금한데.


대답은 생략하겠어.


- '엄마는 내가 그럴 때 정말 정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나는 엄마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 그 거리감을 필요로 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기 시작한 그 낯선 거리감은 처음으로 엄마를 향한 아름다운 거리감을 만들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가 그리웠고, 잃어버린 엄마의 손길이 너무도 달콤한 유혹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가 싫어서가 아니라 독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함을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이해시킬 만한 마음의 거리감이 절실했다.... 갭은 가끔 차갑고 정 떨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그와 나의 다름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가끔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제대로 보인다.'


- 자기도 애들이랑 엄청 가깝잖아.

- 나는 애들이랑 가깝지만 애들 인생에 간섭하려고 하지는 않아. 그리고 지금은 가까워야지. 어른되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 근데 애들이 자기 챙기잖아.

- 뭐? 애들이 나를 챙긴다고? 애들이. 나를. 뭘~ 챙겨주는데?

- 차에서 내릴 때도 조심하라고 이야기하고, 안전벨트 매라고 이야기하고..

- 헐... 어이가 없네.


사실이다.

남편의 잔소리가 조금씩 줄어드니

우리 아이들, 특히 요즘 들어 큰아이 잔소리가 늘고 있다.

- 엄마 차에서 내릴 때 뒤에 차 오는지 보고 내렸어?

- 여기 좁아서 차 못 지나가.

- 오토바이는 지나갈 수 있잖아. 오늘도 안 봤지?

지 아빌 닮았나.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닌가. 그 정도인가? 그래도 사고 날 뻔한 적은 있어도 실제로 사고가 난 적은 없다 뭐.


내 뚱한 표정을 봤나 보다.


- 우리는 자기 챙겨주고, 자기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잖아. 각자의 역할이 따로 있는 거지.


뭐지? 이 느낌은... 기분이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렇게 조심성 없고 덜렁거리는 엄마여도 우리 아이들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만 컸다.


큰 아이 3살 즈음. 종종 아이와 함께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하러 나갔다. 아이는 아빠가 보이자 엄마 손을 놓고 아빠를 부르면 달려갔다. 남편은 달려오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고는 내게 와서

"위험하게 애 혼자 달려오게 하면 어떻게 해! 차도로 뛰어내려 가면 어쩔 거야?"


또 하루는 퇴근하는 남편이 멀리서 오는 모습을 보고 아이와 함께 주차되어 있는 차 뒤에 숨었다. 남편이 다가오자 우리는 "짠~"을 외치며 튀어나갔다. 남편 왈 "차 뒤에 숨어 있으면 어떻게 해! 차 움직이면 어쩌려고! 애한테 차 뒤에 숨는 거 가르치면 안 돼!"


그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인가?

작은 녀석도 자동차 뒷자리에만 타면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날 보며 한마디 한다.

- 엄마 안전벨트 매.

- 괜찮아. 가까운데 가는데 뭐.

- 가까워도 안전벨트 매야지. 사고는 그 사이에도 날 수 있잖아.

흐뭇하게 웃는 남편 표정. 줌 인.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나 밖에 나가면 안전 염려증이래!

걱정 안 시킬 테니까. 잔소리는 좀 넣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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