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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Nov 07. 2022

나를 돌아보기

해군에서 독일까지

매년 11 1. Allerheiligen. 영어로는, All Saints’ Day. 모든 성인 대축일. 망자들을 기억하는 날이다. 휴일이라 특별하다. 할로윈의 유래도 사실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고. 참사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는지, 아니면 이곳에서 춤추러 가고 싶은 친구가 없었는지, 아니면  자체가  싫증이 났는지. 할로윈을 차분하게 보냈다.      


그동안 많은 사건, 이슈에 대한 생각을 갖고,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그걸 썼다. 그에 대한 생각은 있었지만, 정작 현실, 내 삶을 돌아보고, 이에 대해 적은 건 거의 없었다. 누군가의 관계, 고민에 대한 것 외에는. 그렇게 느지막이 일어나서 휴일을 보낸다.      



 18세도  되기 전에 얼떨결에 진해로 가서 여러 곡절 , 졸업한  2  정도 지났을 때쯤인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동기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불투명했고 이룰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오랜 시간 울타리 속에서 살았고, 울타리 너머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무지했고, 두렵기도 했다. 흔히들 ‘ 힘든 과정을 겪었는데 밖에서   일이 무엇이냐 안팎의 이야기에 기대면서도 울타리 밖에서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반년 아니, 1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그게 진로 탐색의 기간이었다고 생각해본다.      


새로운 삶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건 영어 학원.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토플 시험을 혼자 준비할 자신이 없었고, 퇴근하거나 비번을 맞춰 강남까지 가서 수업을 듣곤 했다. 퇴근 시간마다 운전하니 50km 거리에 두 시간, 운 안 좋을 때는 세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밥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잠도 잘 못 잤다. 두 달간 그렇게 하니 번아웃이 오더라... 학원 다니는 사람 중에는 몇 달 더 다니겠다는 이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 정도면 되겠다 싶었고, 시험을 쳤다. 점수가 나오니 다 던져버리고 그 남는 시간에 등산에 빠져 전국을 유람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시절이다.     

 

점수만 땄지, 그때까지만 해도 뭘 하고 싶었는지 잘 몰랐다. 내게 매번 독일로의 유학을 권고했던 아버지에게 가끔 물어보곤 했지만, 아버지도 사실은 세부적인 대학 지원 방법에 대해선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 학력, 졸업장으로, 내가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나만이 알 수 있었다는 걸 꽤 나중에나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을 한 두어 달 보냈을까. 까막눈인 독일어부터 어떻게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다시 학원에 등록했다. 주한독일문화원. 남산 언저리에 있다. 강남보다 거리가 더 되는지라 걱정했지만, 일단 다녀보기로 했다. 두달쯤 다녔을까. 코로나가 터지고 모든 게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었다. 수강생 모두, 예전보다 배우는 게 적다며 아쉬워했지만, 오직 나만은 좋았다. 이젠 그 멀리까지 운전하고 가지 않아도 되니까.

     

독일 문화원에 그렇게 1년 2개월을 꾸준히 다녔다, 온라인으로. 그렇다고 독일어 실력이 늘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싫증을 느꼈지만, 그것 말고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2021 2 . 5년간의 장교 생활을 마치고, 군복을 벗게 됐다. 나뿐 아니라 나의 다른 동기들도 지원했지만, 모두 전역을 하지는 못했다. 규정이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일인데, 나는 운이 좋았고 순간순간마다 고마운 일들이 많았다. 전역을  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도 궁금하면서도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다.     



완전히 백수가 되니까 원래 하던 루틴까지도 그만두고 더 신나게 놀고 싶었다. 그래서 하던 독일어도 때려치기로 했다. 다시 전국을 돌아다녔다. 더 돌아다니고 놀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면 잘 놀았다. 한 달 동안 제주도를 살겠다고 차를 끌고 입도하기도 했다.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니고, 그때쯤은 나름대로 하고 싶은 걸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맘때쯤, 모든 대학에도 지원했다.

      

모든 카톡방을 나가고 그 누구에게도 긴급 상황이라며 전화가 오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그 해방감은 얼마나 갔을까.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마음이 어느 순간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내 불안함의 원천이었다. 불안감을 달래보겠다고 짬 내서 독일어 공부도 하고 시험도 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신나게 놀 걸 싶다.

     

길고 긴 기다림의 끝. 6월 초중순, 가고 싶은 학교의 서류 합격발표를 받았다. 신났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학교에서는 최종 합격발표를 받았다. 그때는 내가 좀 뭐가 되나 싶었다. 3주가 지나고 그 두 기회가 모두 날아갔다. 한 학교는 사관학교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했고, 한 학교는 면접에서 떨어졌다.

      

순식간에 바뀐 내 운명에 좌절했고 침울했다. 9년간의 모든 삶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밖에 나가는 순간, 내가 한 게 그다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분했다. 그래서 늦었지만 새로운 계획을 알아봤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온갖 학교를 다 뒤졌다. 그때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그때 느낀 게 있었다. 독일을 가고 싶어서 가는 것보다도 독일이 아니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건 순전히 돈 때문에. 다른 나라의 학교를 들어가서 그 정도의 학비를 내는 게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는 대안으로 국내 석사도 알아봤고 실제로 지원도 했다. 그때 내가 들었던 생각이 떠오른다.      


등산을 자주 다닐 때면 몇몇 어르신과 정상이나 산 중턱에서 만나는 일들이 있다. 특히 정상에서 어르신들은 다과를 주며 젊은이가 어째 평일에 혼자 산을 타느냐고 묻곤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중 몇몇 어르신은 본인이 젊었을 때 사관학교를 지원했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누구는 성적이 안 돼서, 누구는 신체의 특정 부위 때문에 불합격됐다고 하는데, 그걸 아쉬워하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30년 전의 일을 이야기하는데, 물론 그 어르신은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셨겠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이나 미련 같은 게 남아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했던 생각이, 내가 이렇게 독일을 안 가면 내가 그 어르신들처럼 30년 후에 후회 비슷한 걸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가 독일에서 공부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내가 30년 전에 독일 석사를 붙었다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하며...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싫었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그래서 학부를 찾아봤다. 학부를 영어로 수업하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과도 흥미롭게 보였다. 자소서를 하루 만에 수정하고 그다음 날 일어나서 다시금 한 번 보고 지원했다. 지원하고 오랜 기간 지나지 않아 서류에 합격했다고 면접 날짜가 잡혔다. 그렇게 8월 중순, 합격발표를 받았다. 학부였지만 기뻤다. 그래도 한 발짝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비행기표를 끊고는, 많은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 그게 부담이 되기도 했고, 몇몇 이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지 약속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런 인연과는 이제는 연락하지 않겠단 생각도 들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그래도 많이 보내려고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조금 지나 독일을 오게 되었다. 처음 외국에 살아보니 참 많은 게 달랐다. 여행은 많이 다녀봤지만 사는 건 참 다른 일이었다. 많이 찾아봤고 준비도 많이 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부족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새로운 사람에게 정말 너무나도 개방적이었다. 모든 사람과의 대화 하나하나가 내게는 꽤 특별한 경험이었다. 생김새만 다른 게 아니라, 생각도 참 다르다고 느꼈다. 대부분 나보다 어린데도 배울 점이 참 많았다. 그러면서도 학부생인 게 싫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18세 친구들의 철없는 모습이 수업 시간에 나올 때마다 화가 났다. 배우는 것도 많았지만, 내가 기대했던 수준의 수업도 아니었다. 욕심이 나서 다른 길을 찾아봤다. 그 길을 한 달 만에 알게 됐고, 그때부터 석사 과정 지원을 또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신나게 놀았다. 나름 길도 찾았고 공부도 많이 했고, 무엇보다 정말 좋은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동안 꿈꿔왔던 유럽에서의 생활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6월, 내게 퇴짜를 줬던 학교로부터 합격 소식을 받았다. 그때에서야 진정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았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합격발표가 나니까 더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여러 크고작은 에피소드를 거쳐 그곳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금 이곳에 있다.

      

돌아보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해군에 들어가서 다른 길을 하겠다고 그걸 그만두고 지구 반대편에 와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있으니.

      

공부를 하다보면 느낀다. 예전에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고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것을.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엄청 부지런하게 공부하다가도 한편으론, 많은 게 안정됐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 감사함을 모르고 날씨 탓을 하며 나태해진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신발끈을 한 번 묶고 끝나는 게 아니라 풀어질 때마다 다시 묶어야 함을 깨닫는다.

    

썸머타임이 끝난 이곳은, 5시가 지나면 어둑어둑해진다. 언제까지 이럴지는 모르겠지만 한 자리로 떨어진 온도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움츠리게 한다.


      

한편, 다가오는 이번의 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앞으로의 세상이 밝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공부하면 할수록 자명하게 느끼고 있기에 마음이 무겁다. 돌아보면 내 삶은 10여 년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느끼는데, 그렇다. 매번 결론이 다소 비관적이지만, 개인은 개인의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


베토벤이 그렇게 말했듯, Es muss 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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