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뜨거웠던 겨울을 돌아보며
2002년. 그 뜨거웠던 여름을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강렬했던 기억, 그 전의 내 삶은 아주 희미하게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다. 2006년. 중학교 때였던가. 이천수의 프리킥과 안정환의 역전골. 박지성의 동점골. 그리고 마지막 스위스와의 경기까지. 판정을 두고 말이 많았다.
그리고 4년 후, 2010년. 고등학교 2학년, 고향인 대전 월드컵경기장, 남문광장에서 거리응원을 했던 게 생각난다. 그리스와의 첫 경기를 가볍게 누르는 모습을 보고, 16강은 가뿐히 가겠다고 생각했던 것 그 기억이. 그 유명한 헤발슛, 그리고 박지성의 단독돌파는 아직도 기억난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 아버지는 16강전을 맞이해 수십 년간 보던 TV를 바꿀 때가 되었다며, 새로 LCD TV를 장만했다. 그 첫 개시가 우루과이와의 경기. 여러 가지 실수도 있었지만, 경기를 잘 풀어나갔고, 후반 막판에는 역전골의 기회까지 있었지만, 모두가 아는 물회오리 슛으로 우리의 월드컵은 끝났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이었다. 박지성의 인생경기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듬해, 아시안컵. 고3이었다. 어찌어찌 4강까지 올라갔는데 상대는 일본. 볼까 말까 실랑이하다가 결국 보게 되었는데,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다가 승부차기에서 허무하게 패배했다. 이것이 박지성의 국가대표 은퇴경기. 혹자는 비판할 수도 있지만, 내겐 이때부터가 21세기 들어 대한민국 축구의 암흑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2012년 런던 올림픽. 야심차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모두가 합쳐 영국으로 나온 그들을 8강에서 지동원의 골로 꺾었을 때도, 한국축구의 황금기였다. 그때도 브라질에게 패배했으나, 마지막 동메달 결정전에서 박주영과 구자철의 골로 일본을 꺾고 메달을 획득했으니.
2014년, 사관학교 생도 시절, 시험 기간에 진행됐던 월드컵. 시험을 후딱 치고 와서 경기를 봤던 기억이 난다. 첫 번째 경기는 선방했지만, 처참했던 알제리전. 그러고는 세 번째 경기는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또 4년 후,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인가. 마찬가지로 축구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첫 경기부터 무기력하게 패배. 두 번째 경기도 패배. 세 번째 경기, 누가 기적을 일으킬 거로 생각했겠는가. 당시 두 번째 경기 수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던 선수에 대한 비난은 엄청났고, 이건 일반 국민뿐 아니라, 선수 출신 해설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맞이한 마지막 경기. 이상하게도 이 경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 욕하면서도, 보고 싶었을까.
나는 국내외 수많은 편견에 맞서 경기를 하며,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독일을 꺾은 모습에 적지 않게 감동했다. 그러고는 내 삶도 다시금 돌아봤던 기억이 난다.
4년이 다시 지났다. 군 생활을 접고 이젠 이국땅에서 이 월드컵을 보고 있다. 첫 번째 경기를 보고 기대에 부푼 와중에, 두 번째 경기 전반, 두 골을 실점하는 걸 보고, 바로 스트리밍을 꺼버렸다.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다. 문자중계로 두 골을 따라잡는 걸 보고는, 다시 켰는데, 바로 실점했다. 이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지만 득점하지 못하는 모습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겐 언론에서 경우의 수에 관해 이야기할 게 뻔히 보였다. 그게 참 싫었다.
세 번째 경기. 볼까 말까 참 많이 고민했다. 그래도 안 볼 수가 있나. 전반 초반, 실점하는 모습을 보고는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도 잘 경기를 풀어가더니 이윽고 동점골. 수차례 위기도 있었지만 잘 버텨낸 끝에 정규시간 종료 후 넣은 극장골. 믿을 수 없었다. 사실, 나도 이번 대회 우리 주장에 대해 많이 비판했다. 뭐 어디 하나 댓글 하나 남기진 않았지만, 워낙 아쉬운 모습이 많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래도 공격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한 골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반대로 수비수는 한 번의 실수로도 역적이 되는 것이고. 클래스가 있는 선수는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해낸다는 걸 그가 보여줬다.
재밌는 건, 우리가 질 때는 정규 추가시간이 지나고 몇 분이 지난 후, 경기를 종료시켰다고 심판을 욕을 욕을 하더니, 우리가 이기니 골 세레머니를 했음에도, 빨리 종료시키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모습이 참으로 재밌었다. 내로남불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편, 우리에겐 참으로 좋은 추억이었던 2002년. 그것과 정반대의 기억을 갖고 있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사실 이태리인들이 워낙 불평불만을 많이 하는지라, 더 난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스페인 경기가 더욱 오심이 많았다. 명백한 두 골이 취소됐으니. 또 한편, 2006년, 우리에게 잊을 수 없었던 스위스전. 그때 당시, 피파에 항의서명을 하면 재경기를 한다고 서명을 돌렸던 것도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참 무지하기도 했다. 순수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의식을 가진 이후로 이렇게 여섯 번째 월드컵을 맞이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보고 축구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운동도, 게임도, 레고축구까지 하며 혼자 선수 이름을 붙여가며 한국축구가 월드컵 우승을 할 거라고 꿈꾸던 순간들. 재능만 있었으면 축구선수도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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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전을 마치고, 다시 정리해본다. 경기 전에는 우리가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품었다. 그건 비단 기적이라는 것보다도 우리 대표팀의 첫 번째 경기 때와 같은 수비력을 보여준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아쉽게도, 경기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패가 결정났다. 혹자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페널티킥을 너무 쉽게 허용한 순간, 경기의 추를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애초에 시작하기 전부터 결정났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개인 기량의 차이는 물론 당연한 건데, 이미 보통 경기보다 배로 열심히 뛴 선수들은, 이미 한 경기 쉬고 나온 브라질 선수들을 상대로 그 전의 기동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점 상황을 빼고도 공수간격은 계속 벌어졌고 더 많은 실점을 할 수도 있었다. 뭐 만약은 무의미하지만, 만약에 수비를 더 강화하고,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나갔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보다 감독이 훨씬 더 잘 판단하고 경기 플랜을 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전방에서 강한 압박을 통해 우루과이 때처럼 경기를 풀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뭐 경기야 이미 끝난 것이고, 너무 쉽게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쉽고 우울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친한 외국 친구들이 영상통화로 위로해준다. 외국 친구들을 안 게 이럴 때 참 좋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그렇고, 독일, 벨기에도 떨어졌는데 16강까지 왔으니 이미 좋은 성과를 보였고 참 좋은 선물을 줬다. 이젠 그만 들뜨고 공부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떨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계 최고 선수들과 자웅을 겨룬 선수들. 이미 세 경기 동안 미친 듯이 뛰었는데 이렇다 저렇다 할 게 무엇 있는가. 나도 내 삶에서 그만큼의 노력을 하지도 않으면서.
다음 월드컵에는 또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까. 축구를 좋아하던 한 소년이 이미 서른이 넘어 현역 선수들보다 다 나이가 많아질 거로 생각하니 이런 게 인생인가 싶다. 그때 즈음에는 그동안 있어 왔던 변화보다는 어떤 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지 않을까. 4년 후에 이 글을 다시 보게 될 듯하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이 월드컵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겨울, 머나먼 타지에서 즐거움을 선사한 우리 선수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이젠 각자의 자리에서 더 본연의 삶에 충실할 시간이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