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지역주의의 근원
너무나 당연하게도 독일 내 큰 문제 중 하나인 구서독과 구동독의 갈등, 소득 차이, 정치적 편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역사책에 따르면, 이는 불과 반 세기 만에 생긴 차이가 아니다. 그 뿌리는 2천년전, 카이사르가 게르만족과 전쟁을 할 때부터.
로마의 국경은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기점으로 지어졌다. 그 당시 군사기지이자 국경도시였던 것이 지금의 쾰른, 본, 스트라스부르, 레겐스부르크, 비엔나, 부다페스트 등이다. 이것을 Roman Lime이라고 하는데, 유럽 최초의 만리장성이라고 봐도 되겠다. 그 만리장성에 의해 라인강의 동쪽, 도나우 강의 북쪽은 로마인의 땅이 아니고 야만족, 게르만족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도 적어도 강 유역의 사람들은 로마 입장에서 덜 ‘야만인’이었고 로마인들과 교역을 했다. 끊임없이 강을 넘어 침범하기도 했지만.
로마의 멸망은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게르만족들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게르만들은 어느 순간 ‘문명 사회’와 동화되었는데, 지금의 밀라노가 있는 롬바르디아 지역, 프랑스의 많은 부분도 ‘게르만화’가 되었다.
9세기. 메로빙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서유럽을 정복하고 신성로마황제의 칭호를 교황으로부터 수여받았을 때. 그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군사경계선은 라인강으로부터 동쪽으로 꽤 떨어진, 엘베강으로 옮겨졌다. 지금의 대도시인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프라하 등이 이 강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의 문명화 대상은 가톨릭 입장에서 이교도이자 야만족은 작센족이었다. 이렇게 ‘문명 사회’는 라인강으로부터 엘베강으로 이동했지만, 사실, 엘베강이 로마가 정복전쟁을 펼치던 당시,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멈춘 곳이니, 어쩌면 엘베강 서쪽이 이미 그 전부터 ‘문명사회’였던 지도 모른다. 한편, 엘베강의 동쪽은 당연하게도 계속 이교도이자 야만족이었다. 그리고 유럽의 동쪽 변방으로 여겨졌던 라인강과 엘베강의 중간 지점은 유럽의 중심이자 심장이 되었는데, 이를 우리는 지금 독일의 뿌리라 부를 수 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12세기. 유럽의 중심이었던 독일은 비록 통일된 왕국은 없었지만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함부르크, 브레멘, 뤼벡 등. 이것을 한자 무역 동맹, 한자 도시라고 부른다. 한편, 이를 뿌리로 둔 Teutonic Knight, 게르만 기사수도회는 호시탐탐 개종을 핑계로 세력 확장 및 정복 전쟁을 벌였는데 그중 하나가 폴란드 지역의 Prucsie였다. 이들은 그곳의 ‘야만인’을 개종시켜달라는 폴란드 왕의 부탁을 기회로 삼아 유럽 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이윽고 한자 동맹 세력의 비호를 받아 그들은 그곳에 세력을 쌓고 스스로 프로이센이라 부르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후 제일 중요한 세력, Junker의 뿌리가 된다. 이후 16세기. 종교개혁의 광풍이 휩쓸 때, 이 게르만 기사단은 루터를 만나 가톨릭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복종하지 않기로 한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엘베강 동쪽이 서쪽과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분기점이 된다.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날 때 독일은 완전히 산산조각났다. 이 유럽의 헤게모니를 쥔 건 무려 72년 간 왕좌의 자리에 있었던 태양왕, 루이14세의 프랑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와 인접한 남서부 독일은 어떠한 영향력을 띠지 못했고, 이런 지리적인 배경 속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프로이센이 점차 중부 유럽 내 패권을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을 영원히 해체했고, 그리고 독일 제후국을 모아 라인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도전했지만 참패하는데, 계속된 전쟁 패배에도 오뚝이처럼 일어난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로이센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는 군사일변도 국가였던 프로이센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프로이센이 살아난 건 나폴레옹의 패망. 나폴레옹과의 최후의 전쟁에서 막차를 탄 프로이센은 전쟁 승리의 영광은 물론이고 독일인들의 민족주의 상징이 된다. 사실 똑같은 도이치 민족이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이때 이 나폴레옹 프랑스의 해방전쟁에 발을 늦게 담그며 이 영광, 주도권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게 된다.
나폴레옹 이후 민족주의 사상이 독일 전역에 불붙었다. 그리고 이때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한다. 이미 재상이 되기 전부터 독일 통일의 마스터플랜을 세웠던 그는 그 계획을 밀어붙인다. 먼저 덴마크, 오스트리아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독일 내 연방정부를 구성했다. 이 연방정부의 일부, 남서부 독일은 프로이센에 협조적이지 않았는데, 그는 이 통일의 마지막 퍼즐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찾는다.
라디오 선전을 통해 프랑스 내 반-프로이센 정서를 북돋았는데, 당시 대중의 지지가 형편없었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을 공격하게 된다. 이는 모두 비스마르크의 큰 계획.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했거니와 우수한 무장으로 프로이센은 손쉽게 프랑스를 꺾는다. 그리고 모든 제후국이 프로이센에게 복종하며 1871년 독일 통일의 과업이 완수된다. 이 모든 게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이 모든 영광을 군인들은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사력이라고 믿었던 반면, 비스마르크는 본인의 외교력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어마어마한 제국은 기이한 모습을 띠었는데, 이는 본인이 도이치 민족이라 여겼던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의 800만 인구를 통합하지 않고, 폴란드와 덴마크, 프랑스인의 300만명이 이 독일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 통일보다는 그저 ‘프로이센화’를 원했던 비스마르크는 더이상 독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만약 합스브르크 오스트리아가 이 독일에 포함될 경우, 더이상 지금 통일된 독일은 프로이센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독일 경제, 라인강 중심의 서독일은 우리가 지금 아는 독일처럼,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갔다. 이렇게 군사력은 프로이센, 엘베강 동쪽이 중심에 있었다면, 경제의 중심은 서독일, 라인강 유역에 있었다. 프로이센은 대륙 방향으로 뻗어나가길 원했다면, 즉 영원한 숙적 러시아와의 한판대결을 꿈꿨다면, 서독일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영국과의 대결로 식민지 경영에 뛰어드는 걸 원했다. 이는 불가능할 거라 여겨졌던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동맹을 낳게 한다. 이처럼 정체성부터 추구하는 방향까지 모두 달랐던 두 독일은 완전한 통일로 보기 어려웠고, 그 결과는 시작하기도 전에 진 전쟁을 뛰어들게 했다. 이게 1차 세계대전의 결과다.
이렇게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이 나름대로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을 때, 대공황으로 경제가 파탄났고 희망이 없어진 대중이 나치를 지지했다는 게 내가 알던 독일의 역사였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은 실로 놀랍다. 사실 나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남서부 독일에선 그 정도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엘베강 동쪽에서의 전폭적인 지지로 정권을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라인강의 기적’, 독일인들이 이야기하는 경제기적은 사실 그렇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다. 전후 독일의 산업시설은 고작 6%가량밖에 파괴되지 않았고, 독일은 여전히 유럽에서 제일 큰 나라에 숙련된 노동력이 존재한 국가였다. 거기에 마셜플랜으로 전쟁 중에 있었던 모든 빚은 물론이고, 몇 년간 채무 부담 없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산업활동을 했으니 그런 결과가 있을 수 있었다고. 물론 그 시대를 산 독일인들의 근면성실함 덕분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의 ‘경제기적’은 가능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 채무 탕감이 21세기 유로존의 위기 때 그리스에게 주어졌냐고 말할 때 우린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테다.
긴 역사를 짧게 요약했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독일의 근본적인 문제의 뿌리를 독일 서부와 동부의 차이로 꼽는다.
서독일과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다른 동부의 군사일변도 국가 프로이센과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그들이 나치를 탄생시켰고, 지금의 동일한 뿌리의 극우정당을 지지하는 것도 문제의 구동독 지역이라며 모든 독일의 문제를 그곳으로 돌린다. 이처럼 재통일이 독일에 낳은 안 좋은 영향을 서술한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경제적 차이로 인해 계속된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뚜렷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 대해선 대부분 국가의 수도는 나라 경제의 젖줄인데, 유독 베를린만 적자 재정으로 엄청난 보조금을 쓰고 있다고 꼬집는다. 구동독 지역의 젊은이들은 그곳을 떠나려고만 하고 남은 이들은 나이가 많은 극우 성향의 남성이 대부분이라며 그 해결에 답이 없다면서.
한편, 정말로 구동독, 그리고 그 뿌리인 프로이센이 독일에 악영향만 끼쳤을까. 서유럽과 근본적으로 다른 독일의 경제 시스템을 살펴보자. 2008년 경제 위기 때도 튼튼했던 독일의 경제는 국민 대부분이 투자 혹은 투기를 멀리하고 현금을 많이 쥐고 있었는데, 자산증식과는 멀었던 시스템은 사실 저자가 그렇게나 혐오하던 군사 국가 프로이센의 영향이다. 프로이센은 19세기 말, 관세장벽을 설치해 자국 산업을 크게 키웠는데, 당시 독일 정부, 프로이센의 일관된 정책은 독일 산업에 굉장한 안정을 주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서유럽과 다른 시스템이었다고 저자는 직접 서술한다. 이게 지금 독일 경제 체제의 뿌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독일만큼 사회보장제도, 건강보험제도가 좋은 나라도 없다는 걸 또 상기시킨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 독일의 정책은 사실 비스마르크의 유산이다. 오히려 지금 문제가 되는 독일의 철도는 성과주의의 폐해로, 매번 문제가 되고 있다. 이건 오히려 자유주의, 서유럽 경제 체제에 오리엔트된 독일의 악영향을 끼친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더불어 그전까지 ‘바람직’했던 독일의 경제, 그리고 몇몇 시스템은 프로이센의 뿌리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절대 군국주의, 나치를 탄생시킨 시스템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이 아니라 그저 서부의 주들이 통일해서 만든 독일이 그런 성격을 띠었을까. 2008년의 경제 위기를 극복했던 독일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했다고 하는데, 그런 독일의 변화 중의 하나가 독일 내 자유주의의 급격한 도입이 아닐까 싶다. 과연 독일이 저자 말처럼 동독을 버리고, 잘 사는 서독으로만 나아가는 게 옳은 방향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특히 유럽연합의 위기가 지속해서 언급되는 이 시기에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프랑스 정도, 어쩌면 영국과 같은 신자유주의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우리는 브렉시트 이후 혼란스러운 영국을 목도하고 있다.
이제 유럽을 이야기할 때는 영국은 이미 나갔고, 프랑스는 제대로 갈 길을 못 가고 있으니, 그 모든 부담을 독일이 지고 있다. 앞으로 독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유럽의 리더로, 지속적으로 가치를 지키고 더욱 통합하는 방향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독일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다. 그래도 조금 많이 손해 보더라도, 가치를 지키고자, 아니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하는 독일이 다른 나라보다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