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토스에 관하여

아이젠하워 매트릭스

by 송다니엘

어느 날, 입사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내게 일감을 몰아주기 시작했다. 그가 프로젝트 매니저고, 내가 개발자이다 보니, 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언갈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 그 정도가 지나쳤다.

몇 달동안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다가, 갑자기 내게 한 달 안에 결과를 내라고 하니 황당해서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나도 조금은 누그러져, “아무 말 없다가 금방 결과를 내놓으라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여기저기서 해달라는 게 너무 많아서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해.”라고 했는데, 그는 괜찮다며 내게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들어봤냐며, 네 가지의 도표를 보내줬다.

아이젠하워,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아니던가. 그의 매트릭스는 들어본 적 없었는데, 사실 굉장히 간단하다. 총 네 가지 카테고리가 있다.


Eisenhower Matrix.

급하고 중요한 건 우선 처리, 급한데 중요하지 않은 건 다른 사람에게 위임 (Delegate), 급하지 않은데 중요한 일은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하고, 마지막으로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일은 제쳐둔다는 개념. 이걸 처음 볼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저번 금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하는데, 또 이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무언가에 대한 요청이었는데, 분명히 그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불현듯 내게 아이젠하워 매트릭스가 떠오른다. 그는 분명, 중요하지 않은데 급한 일인 이것을, 내게 위임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를 이런 식으로 꽤 많이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너무 순진했나…?)


이전까지는, 그저 별 거 아니니까 금방 해버리고 말지, 라는 방식으로 이런 일들을 처리했는데 이런 식으로 내가 따지고 보면 정확히는 나의 일도 아닌 무언가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꽤 나빴다.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곱씹어본다. 팀 내 많은 동료가 아주 사소한 일마저 누가 하니 마니 하곤 하는데, 이 모든 게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항상 무언가 일이 있을 때마다 나서서 모든 걸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지만, 보이지 않는 이런 사소한 일들을 내가 하면,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얍삽하게… 보이는, 필요한 일만 해서도 안 되겠지만.. 내게 일을 위임, 아니 떠넘긴 그는, 분명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내게 던지고, 본인은 더욱 “쓸모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인 듯한데, 그 태도가 아주 못돼먹었다.


이 일을 이제야 깨닫고 나니, 내가 알게 모르게 잡다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해보게끔 한다. 나도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이용해 누군가에게 일을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만, 팀에서 제일 신참인 나는, 부려 먹을 학생 인턴도 없고 이런 일들을 나를 위해 도맡아 처리해 줄 누군가가 없다.


그러고 보니 군에 있을 때 사실 많이 경험한 일이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다가, 나중에 화가 나서, 이걸 내가 왜 하냐고 들이받던 기억들도 몇몇 떠오른다. 명확히 내 일이 아닌데도, 내가 하고, 그것에 대한 공로는 제대로 받지 못하던 여러 순간이 떠오르며 주먹이 불끈 쥐어지게 되기도 했다. 사람 사는 게 어디 가나 똑같나...

함정 생활 3년간, 남의 일도 내가 하고,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 경우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간다. 그런 것들 때문에 화가 나서 멀어진 사람들도 꽤 있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이 쉽게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 용서보다는 그다지 교류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고, 당연히 이후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금 직장 생활을 시작하니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뭐 그렇게 따지면, 학교에서 프로젝트 할 때는 달랐냐고 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수없이 마주하는 것이 이와 같은 일 던지기가 아닌가 싶다.


물론, 더 높은 사람은 일이 훨씬 많고, 중요한 일을 해야만 해서 누군가에게 일을 분배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다만, 나와 같은 평사원인 (물론 그가 훨씬 오래되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곤 한다.) 그가, 아니 예전엔 더 중요한 일을 했다지만, 지금도 과연 나보다 훨씬 중요한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며, 이 아이젠하워 매트릭스의 위임을 내게 전개하는 모습에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회사에서 누군가와 적이 될 필요는 없겠다만, 굳이 호구처럼 “아시아인은 일 많이 하니까. 또 시키는 대로 빨리빨리 가져다주니까”의 인식을 줄 필요는 없겠다. 아니, 내가 요청하는 건 빨리 오지 않는데, 나는 왜? 라는 생각이 든다.

다 줄 수 있어도, 일방적인 관계가 그다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랄까. 그들의 위임하는 스킬을 나도 써봐야겠다. 나도 충분히 고급인력이고 너희만큼, 아니면 너희보다 중요한 무언갈 하고 있으니...


허허. 그렇게 오늘도 내게 위임하려던 그의 요청을 다시, 나도 반박해보았다. 언젠가 내가 다시 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도 비슷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괜히 이상하게 즐거운 순간이었다. 나도 경력이 오래된 직장인들처럼 친절한 어조로 위임하는 능력을 키워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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