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 로맨스 섹슈얼리티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가슴 아프고, 불같은 사랑이 있었을 테다. 그런 한편, 그냥 지나가는, 기억에 남지 않는 관계도 분명 있다. 이를 돌이켜볼 때 생각하기를, 하나는 나이가 들면서 이런 일들이 확연하게 줄어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두 사례의 차이가 나는 이유, 그리고 이와 같은 비이성적인 행동 및 감정이 생기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거다. 나는 이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친한 친구는 오랜 이론적인 공부 끝에, 사랑엔 세 가지 층위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로스, 로맨스, 섹슈얼리티.
먼저 에로스를 주관적인 내적 체험, 그중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이라 정의한다. 즉, 사랑에 빠지면 이를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싶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건 어떻게 말하면 콩깍지가 쓰여 누군가를 강렬하게 좋아하는 것일 수도, 헤어지고 나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상실감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 한편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강도가 덜한 걸 우린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서술된 젊은이의 특징을 인용해본다.
“젊은이는 성격상 욕구가 강하고, 무슨 욕구든 충족시키려 한다. 육체적 욕구 가운데 젊은이는 특히 성적 요구에 휘둘리며 이를 억제할 능력이 없다. 젊은이는 욕구에 변덕이 심하고 금세 싫증을 내며, 열렬히 욕구하다가도 금세 식어버린다.”
로맨스는 위에서 서술한 주관적인 체험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행위 양식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하는 헌신적인 행동으로 정의한다. 중세까지만 해도 이 대상을 절대적인 존재로 통제하거나, 개인, 남녀간의 사랑도 신과 관련된, 신에 대한 헌신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만 정당하다고 여겼다. 이후 자유연애사상이 보편화되며, 이런 행위 양식은 애인에게 사치품을 사주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도 발전하며 자본주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를 현대 사회에 대입하자면, 어떤 타자에게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무언가가 로맨스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관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이끌림과, 이로 인한, 본인의 무언가를 희생해서 상대에게 헌신하는 행동. 이 자체가 구분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둘의 구별의 필요성에 대해 학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섹슈얼리티. 성적인 접촉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쾌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쾌감의 지속성, 반복성을 위해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섹슈얼리티를 육체적, 동물적 본능이라는 생리적 토대 아래, 이것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이야기한다면, 기든스는 본인의 저서, “친밀성의 구조 변동”(원제: transformation of intimacy / 부제: Sexuality, Love &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에서 푸코의 이런 관점을 비판하며, 낭만적 사랑, 열정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전자는 일상과 의무로부터 해방이 더욱 드러나는 성적이고 에로틱한 충동에 가깝다면, 후자를 숭고한 사랑의 성찰성을 확장하고 자유와 자아실현을 결합한 개념으로 정의한다.
“낭만적 사랑은 친밀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낭만적 사랑에 빠진 개인에게 그 사랑의 대상인 타자는, 단지 그가 딴 사람 아닌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결여를 메꾸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낭만적 사랑은 불완전한 개인을 완전한 전체로 만들어주는 어떤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섹슈얼리티가 단순히 열정적인 사랑, 욕정에 그치는 것이 아닌, 낭만적 사랑의 성격을 띤다는 걸 주장한다.
이 모든 걸 고려했을 때, 우리가 사랑이라고 할 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건 보통 이 세 가지의 복합적인 요소, 혹은 몇 가지 특정된 몇 가지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작 이 사상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야기한 친구는 근 10년 간 연애를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쉽게 연애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어디서나 큰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