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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May 27. 2022

Leipzig 여행기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

5.26. Leipzig


생도시절 교수님 중의 한 분이 독일에서 학위를 하셨다는 걸 알게 되어 연락을 드려 직접 만나뵌 후로, 유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여러 이야기를 들었던 걸 기억해본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내게 현재 독일에 계신 다른 교수님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렇게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다른 교수님께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린 이후로 벌써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라이프치히. 우리보다 땅덩어리가 훨씬 큰 독일이지라 같은 독일이라고 한들 같은 나라에 있다고 느끼기가 쉽지 않다. 가끔 보면 나라보다도 같은 주에 속해 있는 것만이 가깝다고 느낄 정도이니, 이건 거리뿐만 아니라 문화, 정서적인 차이도 적지 않기 때문. 그렇게 나는 베를린을 제외하곤 처음으로 구 동독지역의 도시에 오게 되었다.


New Berlin. 라이프치히의 별명이기도 하다. 실제로 구 동독 시절에도 워낙 큰 도시이기도 했고, 통일 이후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하였고, 베를린처럼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힙한 술집, 가게도 많기에 부쳐진 별명이라고. 짧은 감상으론, 전형적인 독일 도시 속의 유구한 역사와 복잡한 현대사가 있기에 굉장히 흥미로웠다.

흥미로운 몇가지 역사적 사실을 간략히 적어본다.


바흐가 죽기 전까지 수십년간 살았던 곳이며, 멘델스존, 슈만, 바그너의 터전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영향 때문인지, 오페라 극장은 물론이고 독일 내 최고 음악 학교 중 하나가 있기도 하다. 또, 라이프치히 대학은 6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데다가, 이를 거쳐간 수많은 인물이 있다. 괴테, 니체, 라이프니츠, 헤르츠, 그리고 얼마 전까지 총리였던 메르켈까지.


또, 사람들은 흔히 나폴레옹의 몰락이 워털루 전쟁 때문으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더욱 결정적인 전쟁은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독일에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쟁 100주년, 이를 위한 승전기념탑을 만들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웅장하게 지어진 건축물을 보니 독일스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폴레옹과 프랑스를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뿌리를 그 전쟁의 승리로부터 생각하여 이를 위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정상에 오르니 시내 전경이 잘 보인다. 교수님은 외부 사람 올 때마다 이곳에 꼭 가는데, 가기 전엔, 백이면 백 왜 멀리까지 가냐고 투덜대지만, 막상 와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한 명 없다며. 그래서 나는 교수님은 이곳에 수차례 방문해서 이제 지겹지 않냐고 물었는데, 교수님은 올 때마다 좋다고 하셨다. 그게 나는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와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시내 중심에, 지금은 여러 상점이 들어섰지만, 신성로마제국부터 여러 박람회가 열렸던 장소도 있다. 밀라노의 갤러리와도 유사하다. 비가 내리고 날씨가 우중충해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괴테의 파우스트 내에 하나의 소재, 공간이기도 했다는 점이 인상깊다. 실제로 그곳에선 파우스트 공연을 하기도 한다.


라이프치히 대학 건물 중 하나는 교회 건물이기도 했는데, 구 동독 시절, 대학이 서방세계와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정부가 이에 대한 조치로 건물을 폭파하기에 이른다. 역설적인 건 그 시점이 탈권위주의 운동이 세계를 휩쓸던 1968년. 자유진영에선 68혁명이 일어나는 와중에, 반대편에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 폐쇄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두 세계의 간극은 더 넓어졌고 결국은 공산권은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이 건물은 통일 이후, 여러 논의 끝에 현대적으로 다시 지어져 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굴곡진 독일의 현대사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의미있는 건축물이랄까.


맥주순수령 이전의 라이프치히 특산 맥주도 맛볼 수 있었다. 약간 달콤쌉싸름한 것이 내가 먹던 전형적인 맥주는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바이에른만이 독일의 최고 맥주라고 생각했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이것을 팔던 식당은 예전엔 기차역이었던 곳으로, 바이에른을 왕복하던 곳이다. 이렇게 통행은 오래 전부터 했지만 서로 너무나도 다르다는 건 또다른 아이러니랄까.


어제, 중국집에서 공자의 고향에서 빚던 술인 공부가주를 한 병 시켰는데, 종업원은 이거 독한 술인 거라고 한 병 확실하냐고 물었는데, 안다고 주문했고, 병을 비웠다. 비우면서 교수님은 한국인의 긍지를 보여줬다고 하셨다. 또, 오늘은 내가 독일의 도이치반에 대해 불평하니 우리나라 기차가 정시에 도착한 게 그렇게 오래 된 역사가 아니라며, 본인이 처음 유럽 올 때만 해도, 이곳이 여러모로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한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좋은 점을 나열하는 걸 들을 때마다 조국의 발전에 깜짝 깜짝 놀란다고 하신다. 이런 유머가 우스우면서도 조금은 국뽕에 차는 게 나도 영락없는 한국인이란 생각이 든다.




교수님은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 중에 해군사관학교 교수사관으로 군 복무를 시작하였다. 우린 1학년 당시에 철학수업이 교양과목으로 들어야했는데, 힘든 생도생활에 철학이란 건 너무나도 생경하고, 흥미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기억남는 건 철학 수업 때 정말 많이 잤는데, 단 한번도 교수님이 깨우지 않았다는 것. 난 계속 자다가 마지막 몇 주의 수업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너무 많이 자서, 다른 교수님께 수업들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교수님으로부터 수업 들었던 것 같다고 말씀드리며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땐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재밌는 건 교수님 또한 말년 중위라, 의지가 많이 떨어져서 열성적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그래도 난 A+를 받았는데, 어떻게 받았는지 그 때 당시에 놀랐다고 말씀드렸다. 지금 생각하니, 부끄러우면서도 재밌는 일이다.



나는 공부를 오래 하셨는데, 공부가 재밌으시냐고 물었다. 그러면서도 적절치 않은 질문이었나 걱정했는데, 교수님은 본인의 이야기를 말씀해주신다.


본인이 석사과정 논문 심사를 할 때, 다른 위원들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다른 전공 교수님이 본인을 따로 불러 "2년만에 과정을 이렇게 마친 게 분명히 널 크게 발목 잡을 거야."라고 했다고 하셨다. 그 때만 해도, 그 교수님을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독일 와서 많이 느끼셨다고 했다.


교수님은 전역 이후, 한국에서 박사과정 수료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옮기셨다.


본인이 그동안 하셨던 공부가 원래 하려던 공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수차례 말씀하셨다. 오랜 기간, 학문의 길을 걸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고전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셨다고 했다. 하이델베르크 담당 교수는 공부가 시작되고 2년정도 지나, "넌 공부할 자격이 안 돼."라고 하였는데, 2년이라는 시간동안, 담당 교수는 단 한번도 어떻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고. 그렇게 모든 걸 접고 돌아가려던 와중, 마지막으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이 분야의 다른 권위자였던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에게 연구 결과물을 토대로 메일을 썼는데, 한달쯤 지나 그 교수가 만나러 오라고 했다고 한다. 반신반의하며 찾아갔더니, 도착하자마자 바로 행정담당에게 가서, '우리 새로운 박사과정 학생이야, 등록해줘.'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 당시 울컥하셨다고. 그렇게 지금까지 교수님은 공부를 계속하고 계신다.


교수님은 눈가가 촉촉해지며 이야기하기를, 내게 공부를 하다 보면, 벽을 부딪히는 경우가 있을 건데, 벽을 부딪힌 것만으로도 많이 간 것이며, 그 벽을 넘으면 또다른 세상이 있을 거라고 하셨다. 본인은 그동안 그 벽이 몇 차례 있었다고, 좌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또, 산에는 꼭 정상이 있는 법인데, 많은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 산 중턱에서 수련을 마무리한다고 했다. 산 중턱까지 오른 사람은 학위 과정을 마치고 연구기관에 취직을 하든, 교수가 되든 나중에 다시 정상에 오르려고 해도, 다시 올라가지 못한다고. 즉, 본인의 연구 결과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학위 과정을 빨리 마치는 것이 꼭 좋은 게 아니고, 어떻게 공부를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고전어를 해석한 전설적인 학자의 책 중의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고 한다. 그 누구도 본인의 어깨를 밟을 수 없다. 이말인즉슨, 아무리 뛰어난 이도 이 모든 걸 다 해낼 수 없으며, 이전 세대 학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즉 그 어깨를 밟고 연구를 진전하는 것이며, 본인도 후대를 위해 어깨를 내어주는 역할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은퇴를 앞두고 계신 아버지가 그동안 연구자료를 후배들이 이를 잘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고 있다는 작업을 요즘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땐,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1박 2일 간 정말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 교통권을 끊을 때 교수님은 내게 이곳에 와서 돈 쓸 생각하지 말라면서, 모든 식사, 모든 입장료를 내주셨는데 너무 감사하면서도 죄송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나 또한 내 후배가 생기면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순간, 해군에서 만났던 많은 선배 장교 분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기도 했다. 언젠가 벗을 가난한 유학생 신분을 벗게 되는 되어 은혜를 보답하는 모습도 그려본다.



가끔 난 내 나이 때문에 걱정을 할 때가 있는데, 교수님은 지금 다시 학사부터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는다며, 응원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언제 한 번 친한 친구가 속도보다도 방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때때로 잊는데 또다시 그 말을 상기한다.


또 해군에선 흔히들, 해사 출신들은 황무지에 던져놓아도 살아남는다고 말씀을 하셨다. 일례로, 학사 전공과 전혀 무관한 대학원을 진학하여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학위를 가져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고 하셨다. 그 때 당시만 해도, 학문하는 사람의 긍지가 있었던 교수님은 이 이야기를 아주 싫어했는데, 지금은 그 기간 안에 해내는 것도 정말 엄청난 능력이라고 하였다. 4년 간의 혹독한 트레이닝과 그 이후 장교생활로 단련된 대단한 근성이라고. 교수님은 그런 맥락에서 나도 잘 적응하는 것 아니겠냐는 말씀을 하시는데, 나도 많이 공감하는 바였다. 세상 살며 쓸모 없는 경험은 없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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