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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Oct 16. 2024

에필로그. 죽음의 자기 결정권

죽음의 자기 결정권

내가 이 글을 시작한 그날, 할머니의 회색 눈동자를 본 그날부터 하고 싶었던 얘기였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두 번째로 병원에 입원해 고통에 큰 몸부림을 치셨던 날 밤, 엄마는 전화를 해서 울면서 말했다.

"할머니 보내드리게 주사라도 놔 달라고 할래."

할머니가 큰 고통을 겪으시는데 진통제를 조금씩 더 강한 것으로, 마약성 진통제로 바꿔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고,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기저귀에 볼일을 보는 것을 꺼리던 할머니가 아무런 의식 없이 볼일을 보시고 기저귀를 가는 동안에도 아무 반응이 없으신 상황에 마음이 무거웠다. 겨우 일주일에 한 번 할머니를 보는 손녀인 나도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아... 너무 힘드시다. 더 길게 고생하시지 않고 가셔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하루 종일 보고 있는 엄마는 그 무기력함과 고통이 얼마나 될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엄마, 아는데... 그게 안되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럼 내가 할래. 할머니 더 힘들지 않게 끝내 드리고 싶어. 그러고 내가 감옥을 가야 하면 갈게."


엄마가 정말 그렇게 할까 봐 너무나 무서운 밤이었다.


서른 살에 결혼을 하고 남편 가족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다가 시할머니의 동생분께서 계시다는 곳을 들리기 위해 어느 국도변에 차를 대고 들어갔던 요양원. 침대에 누워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어르신들이 한 방에 쪼르륵 누워계셨고, 우리가 들어갔을 때 모두 멍한 눈으로만 우리를 쫓아오던 그 기억. 그 어둡고 무거운 병실의 느낌. 그곳은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그때부터 나는 존엄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분들 중 그렇게라도 살아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계실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몸을 본인이 가누지 못하고 대소변마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아주 기본적인 존엄성 조차 지킬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수명만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할머니가 나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매달려 그만 놔 달라고, 가게 해 달라고 했을 때 정말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드리고 싶었다. 할머니가 더 이상 그 큰 고통 안에 계시지 않게 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에 우리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마음으로만 더 고생하지 않고 가셔야할텐데 하고 있는 현실.


최근 들어 존엄사를 희망하는, 그래서 그런 제도가 있는 해외로 나가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에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구나 한탄하게 만든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국가에서 존엄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너무나 필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그전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낼 것이다. 그런 만큼 존엄하게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디 내 생의 마지막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고 감사함을 전하고 인사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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