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요, 할머니!
[연재를 시작한 지 채 3주가 되지 않은 지난 8월 12일(월) 저희 할머니가 97년 4개월의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모두 저희 할머니가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병원에 들어간 지 2주가 되기 전 병원에서는 다시 퇴원 얘기를 꺼냈다. 더 이상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할머니의 상태를 감안하면 집에서의 케어는 불가한 상태이고 적절한 요양병원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할머니의 상태는 더 많이 악화되었다. 암의 전이가 진행됨으로 인해 극심한 통증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지속 투약하고 있었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염증 수치로 인하여 항생제가 계속 투약되고 있었다. 심지어 물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라 콧줄을 통해 소량의 미음과 같은 영양식을 투여했다가 그마저도 소화가 되지 않아 다시 주사로 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전에 위장과 십이지장을 직접 연결했던 수술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는 복수가 차서 배가 많이 부풀어 올랐고 중간중간 배에 바늘을 꽂아 빼내는 치료도 진행되었다. 2리터나 나왔다는데 도대체 할머니의 그 작은 배 어디에 그런 물이 고여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 얼마 후에는 VRE균이 검출되어 간호사들이 할머니를 보러 올 때면 커튼 밖에서 전신을 감싸는 비닐 가운을 입고 장갑을 고쳐 끼곤 했다. 일반인에게는 위험하지 않으나 면역이 떨어져 있는 분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어서 하는 조치라고 했다.
그래서, 요양병원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케어할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몰핀의 투여가 가능한 곳. VRE 병동이 분리된 곳, 의사가 상주하는 곳, 복수 천자가 가능한 곳. 이런 조건에 맞는 곳들은 그나마 큰 축에 속하는 요양병원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원래 있었던 요양병원은 내부 규정 상 VRE 보균자는 모두 격리병실을 사용하게 하는데 당장에는 격리병실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그 치료들이 가능한 요양병원 몇 군데의 리스트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급하게 휴가를 내고 요양병원 투어를 하게 되었다. 올케도 궁금하다며 휴가를 내고 나와 함께했다.
요양병원 네 군데를 돌았다. 첫 번째 요양병원은 간호사 선생님이 아주 친절했다. 할머니가 위급한 시점이 되면 별도 병실, 그들 말로는 임종실, 을 제공해 준다. 오랫동안 운영되어 온 요양병원이라서 시스템이 있어 보였는데 다만 간호사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모든 병실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지만 병실마다 문이 닫혀 있는 것이 조금 답답하고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제일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출입구부터 훅 올라오는 냄새였다. 옛날 옛날에 국도변 작은 요양병원에서, 그리고 친할머니가 6년 넘게 거동을 못하셔서 우리 집과 큰집을 오가면서 요양을 하셨을 때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계시면 나던 냄새였다. 엄마가 할머니를 최대한 자주 목욕시켜 드리는데도 그 냄새가 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냄새를 처음 맡은 올케는, 이전에 할머니가 머물렀던 대학병원 내 요양병원이 아닌 다른 요양병원은 가 본 적이 없던 올케는 얼굴을 찌푸리고 힘들어하며 당황해했다. “할머니가 전에 계셨던 병원은 특급호텔이야. 그리고 우리는 지금 모텔을 둘러보고 있는 거고…”하며 올케에게 비유로 설명해 주며 다독여주었다. 이전 요양병원은 진심 호텔급이었다. 병원 건물부터 병실의 크기, 개인 공간의 넓이 등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올케는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냄새에 받은 충격이 잘 가시질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옛날 처음 들어가 본 작은 요양병원에서 느꼈던 충격이었을 거다. 아니, 사실 그 병원보다는 규모가 크고 깨끗한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충격은 아닐 거라고 나 혼자 생각했다. 어떤 요양병원은 분명히 지인의 결혼식으로 왔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요양병원으로 변해 있었다. 덕분에 층고가 높아 공기 순환이 조금 더 잘되어서 그런지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 약했다. 어떤 요양병원은 공간은 전문성도 떨어져 보이고 큰 규모지만 작은 병실에 환자들을 그득드극 채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도 있었다. 또 장사를 하는 것처럼 병원비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흥정을 했다. 어떤 요양병원은 따뜻하고 좋은 분위기였으나 엄마가 매일 병원을 방문하기 너무 멀고 불편했다.
많은 고민 끝에 우리는 엄마가 방문하기도 가깝고 시설이 개중에 깨끗한 결혼식장을 개조한 요양병원으로 결정했다. 병원은 VRE 보균 환자들끼리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있고, 상주 의사가 여러 명 있으면서 그들이 당직도 겸하는 병원이었다. 상주의사와 당직의사가 따로 있는 것보다는 믿음이 가는 것 같았다. 다만, 건물에 비해 병실 각각이 좀 작은데 침대 6개가 양쪽 벽에 세 개씩 벽으로 쪼르륵 붙여 놓여 있는 것, 긴급한 상황에서도 별도의 ‘임종실’ 제공은 불가하고 침대와 같은 사이즈로 붙어있는 커튼레일을 따라 커튼을 치는 것이 개인 공간의 다라는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바로 주말이 지나 월요일 할머니는 새 요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번에는 할머니의 적응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몰핀의 영향으로 의식도 희미하고 몸을 스스로 가누지도 못하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새 병원에 입원이 완료된 그날 오후, 갑자기 혈압이 많이 내려가 위급한 상황이라는 연락이 왔다. 요양병원에서는 승압제 사용을 논의하며 사용하지 않을 경우 오늘 중 사망하실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두 달 넘게 이어진 시간 동안 할머니의 생명을 담보로 한 수많은 결정을 내렸다. 응급실에 처음 들어간 날 위내시경 중 쇼크가 왔을 때 심폐소생술을 할지 여부가 그 시작이었고, 이것이 마지막 결정이었다. 우리는 힘들었지만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만약 한 달 전 요양병원에서 승압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할머니를 이렇게 긴 고통에 머물지 않게 해 드릴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있었다.
이 병원에서는 ‘임종실’이라는 방을 따로 만들어주지는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서너 명씩 나눠져서 순서대로 병실에 들어가 할머니를 보고 내려왔다. 다행히 오늘 할머니가 들어간 방에는 손수 거동을 하시는 젊은 어르신 혼자만 계셔서 양해를 구하고 원래 안내된 시간보다 조금씩 더 길게, 그리고 침대만 둘러싸는 커튼을 두르지 않고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감았다 하셨지만 우리를 알아보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잠깐 눈을 뜨셨을 때 본 할머니의 눈동자도 여전히 회색이었다. 대신 중간에 등이 아프다고 표현을 하셔서 비닐장갑을 낀 손을 할머니 등 밑으로 집어넣어 손가락을 움직여 마사지를 해드렸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계셨고 시원한지 묻는 말에 답도 하지 않으셨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병원 1층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다행히 또 혈압이 조금씩 안정화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과 함께 이제는 할머니가 더 힘들지 않으시고 빨리 편안해지시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욱 절실한 밤이었다.
할머니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면서 우리는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할머니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을 때 할머니를 모실 수목장은 예약해 놓았었다. 할머니는 선산에 만들어져 있는 가족 납골당에는 답답할 것 같아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었기 때문이다. 그 외 상조 관련 사항을 포함하여 이것저것 준비를 하던 중 올케가 연락을 해 왔다. 본인이 다른 장례식장을 갔었는데, 결혼식이나 돌잔치에서 하는 것처럼 돌아가신 분의 사진이나 영상을 비디오로 만들어서 틀어주었는데 그것이 그분을 추억하고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온 가족과 지인들에게 뜻깊은 선물처럼 느껴졌다고, 우리도 그런 걸 만들면 안 되냐고 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진을 다 모아보면 올케가 앱을 사용해서 영상을 한번 만들어보겠노라고 했다.
통화를 끝내고 바로 최근 약 20년간의 사진이 모아져 있는 구글포토를 열었다. 특정 사람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모든 사진을 선별해 주는 메뉴에서 할머니의 얼굴을 선택하고 필요한 사진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모여진 폴더를 올케와 공유해 주면 되는 손쉬운 일이었다. 잠시 후, 폴더를 완료하고 올케에게 접근권한을 준 후 나도 어떤 사진들이 있는지 훑어보기 시작했다.
근데, 그 어느 사진 하나 할머니의 얼굴이 가운데에 있는 것이 없었다. 조카들 사진 찍어주는 데 뒤에 계시거나 놀러 가서 같이 사진을 찍으면 꼭 한쪽 끝에 구부정한 할머니가 계셨다. 내가 셀카를 찍으며 가족들을 뒷배경에 거는 곳에 할머니의 작은 얼굴이 있었다. 그나마 최근에서야 할머니 얼굴을 남겨야겠다고 몇 번 찍은 게 다였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곱씹기 위해 만든 이 파트는 어느 순간부터 후회의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날 또 후회했다. 왜 할머니가 건강하실 때 할머니의 모습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나의 짧은 생각과 어리석음을.
하지만, 상투적인 말일지라도 믿고 싶다. 할머니는 평생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계실 거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 머릿속 가득 남아있는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얼굴 말고 이런 웃으셨던 모습들을 더 떠올리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