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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Sep 25. 2024

할머니의 회색 눈동자

뒤늦은 후회...

[연재를 시작한 지 채 3주가 되지 않은 지난 8월 12일(월) 저희 할머니가 97년 4개월의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모두 저희 할머니가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엄마는 매일 병원에 면회를 가서, 이제는 면회실로 나올 수 없는 할머니를 만나러 병실 안에 들어가 한 시간씩 할머니를 돌보다 오셨다. 할머니가 연세도 많으시고 - 그 큰 요양병원에서 나이로 짱 드셨다 - 상태도 좋지 않기 때문에 원래 면회시간으로 정해진 15분~20분을 넘어서는 것을 병원 측이 양해를 해 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날 이후 몇 번을 더 혈압이 내려갔다가 올라왔다가 하는 날들을 반복하였다. 며칠 후부터는 백혈구 수치도 높아져서 갈수록 더 강한 항생제와 진통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식사는 전혀 못하시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은 진통이 심해서 고생하시고, 어느 날은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어느 날은 손발이 다 퉁퉁 부어올라 고생하셨다. 할머니의 증상은 날이 갈수록 다양하고 힘들어 보였다.


요양병원에서는 아무래도 병원 응급실로 가서 원인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 요양병원에서는 CT나 MRI 등의 검사가 불가하니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광범위 항생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태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암 4기 진단을 받은 할머니를 위해 병원에서 더 어떤 조치를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쾌유를 기원하며 병원을 나온 후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휠체어에서 일어나 주 5일 운동을 하며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지 3주도 지나지 않아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할머니의 암은 복막까지 전이가 되어 있다고 했다. 또 수술 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항생제를 사용하고 있었고 최근 요양병원에서 그 강도가 높아졌었는데, 그렇게 장기적으로 항생제를 사용할 경우 유익균들이 죽기도 하고, 항생제로도 안 죽는 나쁜 균이 더 많아져 장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런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항생제를 사용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검사 결과 위막성대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다른 종류의 항생제와 함께 더욱더 강해져 가는 할머니의 통증 강도로 인하여 암말기 환자들에게 투여한다는 마약성 진통제인 몰핀이 투여되기 시작했다. 입원 이틀 후였다.


처방이 난 항생제는 경구투약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가 뭐든 삼킬 수가 없는 상태라 코에 관을 삽입하여 투약하도록 진행되었고, 또다시 할머니와 엄마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불편해서 무의식 중에라도 콧줄을 빼려고 손을 대는 할머니와 그걸 못하게 말리는 엄마. 엄마가 매일 전해주는 소식은 할머니가 내내 통증으로 몸부림을 치시거나 콧줄을 빼려고 하는데 못하게 말리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고 계신다는 거였다.


주말에 엄마와 교체하여 병원에 들어가던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는 했으나 뭔가 공기도 맑은 것 같고 나오는 길 아파트 화단에 피어있는 봉숭아 꽃을 발견하고 옛 추억에 잠겨 꽃을 따서 병원에 오던 날(프롤로그 참고) 나는 처음으로, 물론 그전에도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커다란 두려움과 마주했다.


몰핀 처방을 시작하면서 의사는 할머니가 의식이 흐려지고 대화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었다. 통증이 가장 문제이기 때문에 통증 조절이 우선이라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병실에 들어가 환하게 웃으며 할머니와 마주 앉아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며 나 왔다고 얘기를 하는데, 할머니의 눈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원래 할머니의 눈동자가 어떤 색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할머니의 눈의 거의 회색에 가까웠다. 분명히 할머니와 나의 눈이 마주 보고 있는데 내가 움직여도 할머니의 눈동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겨우 꾹 참고 할머니에게 실없는 소리를 해 댔다. 하지만 할머니의 눈동자를 포함 할머니의 어떤 몸도 나의 얘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전에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할머니를 보고 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팔을 움직여서 콧줄을 빼려고 하기에 빠르게 몸을 움직여 할머니 손을 낚아채고 얘기했다. "안돼, 할머니~" 그 순간, 그 힘이 없고 회색이던 할머니의 눈이 나를 쳐다봤고 축 늘어져 있던 할머니의 온몸이 순간적으로 딱딱해지면서 펄떡였다. 할머니는 힘을 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왜 아무것도 못하게 해! 놔! 저리 가!'라고 아주 크게 소리를 쳤다. 병실 안에 순간 정적이 돌았다. 병실 내 다른 침대의 환자와 간병인들도 모두 동작을 멈춘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놀라 할머니의 팔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정신이 멍 해졌다. 다음 순간 다시 할머니의 온몸이 축 늘어졌다.


눈물이 흘렀다. 어차피 커튼 안에는 할머니와 나 밖에 없었고 할머니는 나를 보지도 느끼지고 듣지도 못하시니 이번만큼은 참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무서웠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 다른 인격이 되어 가는 할머니. 할머니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 할머니가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남편은 당분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할머니와의 좋은 기억과 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이런 기억때문에 상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 후 며칠동안 할머니의 그 눈동자와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도 무서웠다. 그렇게 될까봐...




엄마 아빠는 가게를 하셨다. 아빠가 회사를 다니시던 동안에는 엄마가 골목가게를 하셨고, 이후 커다란 어머니 구판장도, 식당도, 부동산도 하셨다. 특히 식당을 하실 때에는 새벽부터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두 분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식당에 딸린 쪽방에서 지내시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5학년 정도까지는 할머니와 나와 남동생, 셋이 살았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지내고 할머니 밥을 먹어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한식을 좋아한다. 아니, 한식만 좋아한다. 김치도 된장도 나물도... 특히 육류보다는 생선을 좋아한다. 우리 집 밥상에는 항상 생선구이가 있었다. 고등어나 삼치, 갈치, 꽁치. 특히 나는 꽁치를 좋아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면 항상 생선 굽는 냄새부터 났다. 고기라고는 삼겹살이 한 달에 한 번이나 많으면 두 번 올라왔던 것 같다.


몇 년 전, 가족들이 모여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할머니에게 뭘 드시고 싶냐 여쭈면 항상 너네들 먹고 싶은 거 해라 말씀하셨다. 그날도 똑같았다. 그러다가 엄마가 맛있게 먹었던 코다리 조림이 있어 그걸 포장해 와서 먹게 되었다. 근데 할머니의 젓가락질이 평소와 다르게 힘이 없다.

"할머니, 왜? 맛이 없어?"

할머니는 간에 진심이기 때문에, 그리고 짜게 드시는 편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실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근데 할머니의 대답은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난 생선 안 좋아해."

이게 무슨 말인가? 평생을 생선을 구워주셔서 나도 생선이 좋아졌고 식탁에 필수라고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그냥 원래 그랬었다고만 말씀하셨다.


어느 날인가는 집에서 삼겹살을 구웠다. 콩나물도 무쳐서 밥과 함께 맛있게 싸 먹고 있는데, 할머니의 젓가락질이 힘차다. 그 후 소고기도 양고기도 할머니의 젓가락질을 힘차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할머니 생신이거나 특별한 날이면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 남편부터 '할머니는 온리(only) 고기시지!' 했다.


평생을, 97년을 사시며 본인이 싫어해도 자식과 손주들 맛있게 먹이겠다고 저녁마다 생선을 굽던 할머니, 본인이 요리를 하지 않던 시간에도 딸이 구운 생선에 불평 한마디 하지 않던 할머니.


장례를 치르며 장례지도사가 평소 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라고 말하는데, 우리 할머니가 고기 말고 또 좋아했던 음식이 뭐였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음식뿐만 아니라 나는 할머니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뭘 하는 걸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토록 할머니를 모르고 할머니에 대한 배려가 없던 손녀였구나.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마지막을 기록하며 할머니와의 추억을 곱씹어보겠다는 염치없는 생각을 했었구나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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