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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Sep 11. 2024

요양병원, 적응 그리고 첫 가족호출

나는 아이 없는 할머니의 걱정거리

[연재를 시작한 지 채 3주가 되지 않은 지난 8월 12일(월) 저희 할머니가 97년 4개월의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모두 저희 할머니가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에게 첫 요양병원의 이미지는 너무도 암울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할머니께서 여동생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갔던 국도변 작은 빌딩의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기력이 없는 아무 활동을 할 수 없는 할머니들만 모여 누워계셨던 곳이었다. 그 분위기와 냄새가 그 나이의 나에게는 너무나 무서웠고, 우리 가족 누구도 그런 곳에 보내지 않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 우리 마음 같지 않아 우리는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결정을 했다. 다행히 할머니가 갈 요양병원은 아주 넓고 여유롭고 환하고, 병실도 밝았다. 무엇보다 넓은 병실에 깊숙이 해가 비치는 것이, 그리고 중정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로 복도도 밝은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매일 오전 오후 면회 시간이 있어 원하는 날은 언제든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면회라는 것이 없고 등록된 보호자 1명만 함께할 수 있어서 그나마 주말에 엄마와 보호자 교대를 했던 나를 빼고 다른 가족들은 한 달간 할머니를 보지 못했었기에, 우리 모두 이제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었다. 조카들도 이제 증조할머니 보러 갈 수 있는 거냐며 좋아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그날 밤,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고. 자기를 여기서 좀 데리고 나가 달라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화를 낸다고, 새벽에 와서 나를 좀 데리고 집으로 가라고 울면서 할머니가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엄마는 펑펑 울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내가 잘못 결정했나 봐’ 하면서 우는 엄마에게 아니라고,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 이건 예상했던 일 아니냐고, 자책하지 말라고 달래면서도 혹시 내가 잘 못 결정하고 엄마와 동생을 억지로 설득한 것이 아닌가 나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아침에 급히 회사에 휴가를 냈다. 새벽부터 요양병원에 바로 가겠다고 하는 엄마를 달래서 아침 면회시간인 10시에 가기로 하고 머리를 정리했다. 결론은 같았다. 우리가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10시 면회시간이 되어 병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 면회 접수를 하고 면회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간병사가 휠체어를 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할머니 표정은 많이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간병사는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고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병실로 돌아갔다. 면회 시간은 15-20분이었다.


할머니에게 모른 척하면서 물어봤다. 첫날이 어땠는지, 뭐가 불편했는지.

할머니의 제일 불편한 점은 화장실을 데려가지 않는 간병사, 할머니에게 화를 내는 간병사였다. 할머니는 병원에 있는 내내 소변줄을 끼고 있다가 요양병원으로 오면서 소변줄을 뺐다. 그리고 이제는 기저귀에 볼 일을 보셔야 한다고 안내받았다. 하지만 그건 할머니 자존심에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인은 간병사가 휠체어로 화장실 안에 넣어주고 변기에만 앉혀주면 볼 일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해 달라고 하니 화를 내고 소리를 쳤다는 거였다. 마음이 아프고 불편했지만 꾹 누르고 할머니에게 얘기했다.


“할머니, 우리가 간병사랑 간호사에게는 얘기를 해 놓을게. 근데 할머니 말고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까 그때그때 해 주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럴 때는 참지 말고 기저귀에 해. 참으면 병 돼. 그리고 밤에 잘 때는 간병사도 자야 하니까 기저귀에 해야 할 거야. 그건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 절대 창피한 거 아니니까 너무 마음으로 힘들어하지 말고 해, 할머니. 알았지? ”


할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밤에는 그렇게 해 보겠노라고 얘기했다.


시간이 되어 간병사가 돌아왔다. 아마도 할머니가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했을 거라는 것을 짐작했을 테지만, 할머니를 모셔가기 전에 우리에게 불만을 토로하신다.

“할머니가 30분마다 화장실을 가시겠다고 하는데, 그건 못해요. 그래서 참으시게 하고 어느 정도 찬 것이 확인됐을 때 (나중에 알았지만 무슨 기계로 배를 스캔하면 소변이 얼마나 찼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모시고 가요. 근데 밤에는 안 돼요! 그래서 기저귀에 하시라고 했는데, 밤에 몰래 침대 난간 옆 공간으로 내려오다가 침대 밑에 주저앉아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다칠까 봐 간호사님이 그 공간에 붕대로 못 내려오시게 묶어 놨어요.”


할머니가 우리에게 하지 않았던 얘기들이었다. 근데, 간병사의 억양이 좀 많이 세다. 병원에서부터 만났던 간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인, 조선족 분들이라 그분들 특유의 억양이 있는데, 그중에도 억양이 쎈 축에 속하시는 분이었다. 하루 만에 할머니는 간병사가 얘기할 때 슬쩍 눈치를 보더니 주눅이 든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몸을 움츠리셨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부탁드려야 하는 우리는 갑자기 '을'의 입장이 된다. 적응을 하시는 기간이 필요하니 죄송하지만 조금 너그럽게 지켜보고 도와주십사 하고, 몸 보다도 정신적인 적응이 필요하신 상태이니 부탁을 좀 드린다고 부드럽고 정중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더 목소리를 높여 말하려는 간병사의 어깨를 가볍게 지그시 잡고 눈을 마주 보며 다시 한번 말씀드렸고, 내 의도를 읽으셨는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러마 대답하였다.


간호사실도 방문했다. 간병사가 했던 얘기를 똑같이 했다. 특히 혼자 침대를 내려오다가 떨어지거나 넘어져 골절이 될까 봐 큰 걱정이었다. 할머니 병실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할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혼자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지면 다치니까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할머니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매일 면회를 갔다. 할머니는 차츰 안정을 되찾고 계신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돌아온 주말에 나도 다시 면회를 갔다.


가는 길에 제과점에서 롤케이크 두 개와 과일가게에 들러 참외와 자두를 샀다. 들어가는 길에 간호사실에 롤케이크를 전달하고, 할머니를 모시고 나오는 간병사에게 참외와 자두를 드렸다.

“이거 할머니 까드리라구요? 못 드셔요!”

“아니요. 우리 할머니가 이걸 어떻게 먹어요. 아주머니 입 심심하실 때 드시라고요. “

나를 한번 놀라 쳐다보시더니 밝게 웃어 주신다. 그래, 우리 할머니를 힘들게 돌봐주시는데 아무리 비용을 내더라도 이런 마음을 써드리는 건 서로에게 마음을 나누는 일이지.


사실 간병사와의 첫 만남 이후 갈등을 많이 했다. 주변에서는 응당 돈을 따로 더 챙겨드려야 하는 거라고 했다. 마음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으나 할머니를 맡겨 놓은 이상 그게 도움이 된다면 (물론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지속적으로 불편함이 있다면 병원을 통해서 병실을 바꾸거나 간병사 변경을 요구해야지 그렇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하루 종일 할머니를 보살펴주는 분이니 감사의 마음은 표현하고 싶어 매일 병원에서 도시락을 드시는 것을 감안해 과일을 사 가지고 간 것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할머니가 그 요양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간병사와 할머니의 관계는 조금씩 편해졌고 가족들도 감사한 배려를 받았었다.  


할머니는 한층 생기가 있어졌다. 잠깐 보고 싶어 하시는 다른 가족들 영상 통화도 시켜 드리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가 재활운동 한 얘기를 하시더니,

“일어나 볼까? “ 하면서 휠체어 손잡이에 손을 올려 힘을 주더니 일어나신다.

“어! 할머니 아직 위험해!” 하면서 만류하려고 할 때, 할머니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어! 와~~~!!” 할머니가 본인의 힘으로 일어나 있었다.

아직 걷지는 못하지만 이제 힘이 생겼으니 운동을 하면 더 좋아질 거라고 기분 좋아하셨다. 그날부터 주 3일로 신청해 놓았던 재활 운동을 할머니의 요청으로 주 5일로 변경해 놓았다.


집으로 오면서 남편과 너무 기분이 좋아 하하 호호하면서 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이것이 불편할 텐데 어떻게 바꾸지, 뭐가 필요할까... 하는 대화를 이어갔다. 날씨가 그렇게 좋지도 않았는데 좋았다.


주말이 지난 화요일 점심시간에 회사 부서원들과 점심을 먹다가 할머니 안부를 묻는 직원들에게 이 일을 얘기하면서 너무 행복해했고, 모두들 다행이라고 잘 되었다고 같이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가족 모두 오늘 면회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제안이 있었단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느 날, 할머니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나도 이제 늙었나 봐, 할머니. 몸이 이렇고 저렇고 그래서 좀 그래' 하면서 푸념을 하고 있었다. 본인 나이의 겨우 반도 살지 않은 손녀딸이 그래도 마흔을 넘겼다고 나이가 들었나 보다 얘기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웠을까.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것도 할머니를 웃겨주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근데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가 갑자기 말했다.

"OO이(올케, 남동생 부인)한테 잘해!"

갑자기? 하는 마음으로 "그럼, 내가 OO이 한테 얼마나 잘해줘. 그리고 우리 잘 지내잖아. 알면서~"


실제로 나와 올케는 자주 연락을 나누고 같이 여행을 다니기도 하는 친한 사이다. 남동생과는 맞는 것이 하나 없는데 올케와는 맞는 것이 많아 공감대 형성이 잘 되었다. 나도 나름 시누이 노릇 안 하고 올케도 나를 편하게 대해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잘 지내는 시누올케 사이었다. 올케가 먼저 제안해서 엄마랑 나랑 올케랑 셋이 매년 여름에 짧은 여행을 가기도 하고, 자기네 가족이 캠핑을 가면 나와 남편에게 놀러 오라고 연락을 해서 의자 두 개 딸랑 들고 가서 맛있는 캠핑요리만 얻어먹고 빠져나오기도 하고, 조카와 올케 나 셋이서 해외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언젠가 여행 중에 올케가 다음 생에는 친자매나 친구로 태어나자고 얘기할 정도라 나름대로 우리의 사이를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관계를 할머니도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할머니의 말이 생뚱맞게 느껴졌었다.


할머니는 계속 말씀을 하셨다.

"OO이 한테 계속 잘해. 네가 OO이 도움을 많이 받을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OO이가 너보다 많이 어리잖아."

아..........


어느 날인가 할머니에게 나는 왜 이렇게 돈이 많이 안 모이는지 모르겠다고, 그나마 작고 싼 집이지만 집 하나 있는 것이 얼마나 안심인지 모르겠다고, 나중에 안되면 주택연금 받아서 다 쓰다가 죽으면 되니까 등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정색을 하면서 얘기했다.

"다 쓰지는 말고 조금은 남겨놔. 남겼다가 XX이(큰 조카, 남동생의 큰 아들)랑 YY이(둘째 조카, 남동생의 둘째 아들) 좀 줘"

"왜~~~ 걔들은 지 엄마 아빠가 신경 쓰는 거지, 내가 왜~~~" 하면서 앙탈을 부렸다.

"그래야 걔들이 나중에 널 도와주지..."

아...........


나는 남편과 둘이 살고 있다. 아이가 없다.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할머니에게 아이 없는 나의 미래는 걱정거리였나 보다. 나중에 내가 할머니 나이가 되면 지금보다 노인들을 위한 복지가 더 잘 되어 있을 거라고 안심하라고 농담처럼 얘기하면서도 그런 걱정을 하시게 해 죄송한 마음에 가슴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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