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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Sep 18. 2024

무사히 넘긴 첫 고비

해방 전 후의 치과치료

[연재를 시작한 지 채 3주가 되지 않은 지난 8월 12일(월) 저희 할머니가 97년 4개월의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모두 저희 할머니가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급하게 남편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기로 하고, 회사에 휴가를 내고, 부랴부랴 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차를 몰아갔다.


오늘 아침부터 급격하게 혈압이 떨어지고 백혈구 수치가 높아져서 항생제를 투여하며 혈압을 높이기 위한 조치들을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많은 조치들) 한 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최종적으로 승압제를 사용하게 될 건데 그러고도 혈압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려울 수 있어서 가족들을 오시게 했다고,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6인실 규모의 빈 병실로 할머니 침대를 옮겨주었고, 그곳에서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서 할머니와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중에 다른 큰 규모의 요양병원들을 돌아봤지만 이렇게 위중할 때 별도로 방을 만들어주는, 그들 용어로는 임종실, 병원이 별로 없었는데 이 것은 정말 환자와 가족, 그리고 병실을 같이 쓰는 다른 환자들을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그 방, 그 침대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계셨다. 그러다가 몸의 모든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몸이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도 못하기도 했다. 가슴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온몸이 다 아프다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내가 ‘할머니, 나 왔어~‘하고 할머니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갖다 대니 힘겨운 목소리로 전에 했던 그 말을 또 하신다.  


“나 좀 보내줘”


그 말이 정말 가슴에 저리게 아팠다.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얼굴을 피했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창가로 가서 이미 울고 있는 올케에게 아직은 아니라고 달래며 나도 눈물을 참았다.


의사와 간호사가 수없이 드나드는 그 저녁, 할머니는 아직은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지만 휘몰아쳐 오는 통증에 기세를 내주고 계셨다. 잠깐씩 통증이 줄었을 때 다가가면 회사는 어떻게 하고 왔냐고,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다시 통증이 찾아오면 울부짖으면서 통증을 호소하였다. 병원에서는 조금씩 더 쎈 진통제를 투약하였고, 또 돌아오지 않는 혈압을 올리고자 최종적으로 승압제를 투약하였다. 할머니의 진통은 점차 가라앉았고, 우리는 모두 말을 잊은 채로 병실 여기저기로 둘씩 셋씩 흩어져 앉아 할머니를 쳐다보고 앉아 얘기를 나눴다 눈물을 흘렸다 했다.


저녁이 늦어서야 의사는 이제 조금씩 혈압이 돌아오고 있어 할머니가 이번 고비는 잘 넘기게 되실 거라는 얘기를 했다. 이제 본인들이 잘 돌볼 테니 가족들은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너무 급작스러웠던 호출에 너무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우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들 식사도 못하고 오후 내내 긴장해 있었던 터라, 가볍게라도 밥을 먹자 하고 병원 근처에 늦게까지 하는 식당을 찾아갔다. 그래도 할머니가 안정을 찾아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나누며 가볍게 밥을 먹고 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인지 남편도 나도 그날 밤새 배탈이 나서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 102살에 돌아가신 남편의 할머니 때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서너 번은 이런 일이 있을 테니 마음을 다잡자, 할머니가 이제 안정을 되찾아서 다행이다 얘기를 나누었다.


아직도 이틀 전 휠체어에서 일어나 기분 좋아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눈에 선해서,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곧 다시 기력을 회복해서 또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품어보았다.




치과 신경치료로 고생하고 있던 어느 날, 할머니에게 치과 가기 싫다고 슬쩍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본인도 치과는 참으로 무섭고 싫다고 공감을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한 할머니는 매일 저녁 틀니를 닦아서 용기에 담아놓으셨다.   어렸을 때는 화장실 선반에 있는 할머니의 틀니가 좀 무서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틀니를 빼면 조금은 강한 인상의 할머니 얼굴이 3분의 2로 줄어들고 동그래지면서 굉장히 귀여운 만화 속 할머니처럼 변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얼굴이 귀여워 틀니를 빼시면 귀엽다 귀엽다 칭찬을 했고, 그러면 할머니는 인상을 쓰면서 본인은 본인의 틀니 없는 얼굴이 너무도 싫다고 하셨다. 틀니를 뺀 할머니가 그렇게 얘기를 하면 더 귀여워져서 나는 더 웃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처음 치과치료를 받을 때 어땠었는지.

“해방 전인데….”

어? 해방 전이란다. 그렇지. 우리 할머니는 1920년대 생,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낸 역사 속의 인물이지. 예전에 일본어를 공부할 때 내가 하는 일본어를 알아듣는 할머니에게 아무 생각 없이 어떻게 아시냐 하면 옛날에 어쩔 수 없이 배워서 알지 하고 말던 할머니였다. 한국 전쟁 때 피난을 가던 사람들을 TV에서 본 날, 할머니는 어땠는지 물으면 그냥 피난 안 가고 과천에 있었지 하고 말던 할머니였다. 더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항상 넘겼던 할머니여서 그 언젠가부터는 아예 그런 종류의 질문을 할머니에게 하지 않았었다. 그런 할머니 입에서 ‘해방 전‘이라는 단어가 잠깐 깜짝 놀랐지만 너무 궁금했다.


”할머니, 그때는 엑스레이도 없고 하지 않았나? 그런 걸 봐야 이가 썩었는지 아닌지 아는데 어떻게 했지?“

“해방 전인데, 그때는 치과고 뭐고 없었어. 그냥 병원에 갔는데 이가 썩었다고 해서 뽑았는데 죽는 줄 알았다. 근데, 해방 후에…“

어? 해방 후?

”해방 후에 일본에서 치과 하던 선생이 한국에 들어와서 치과를 차렸대. 근데 우리 오빠가 그 선생을 어떻게 알았어. 우리 오빠가 공무원이었는데 그렇게 사람들을 잘 새겨.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이도 알아. 그래서 오빠가 데려가서 치과치료라는 걸 처음 받았지. 근데 아파. 똑같이 아파. 그래서 나도 치과 싫다.“


현타가 왔다. 할머니와 나의 세대 차이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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