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로부터 인간을 사육하는 힘
(반종교적인 이야기 아님.)
희망이라는 단어는 늘 환하게 빛난다.
그것을 말하는 자들은 목소리를 맑게 띄우고,
그것을 듣는 자들은 고개를 든다.
희망은 따뜻하고, 아름답고, 용기를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그 단어를, 이제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희망은 이 세계가 살아 있는 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만든
가장 정교한 감옥이다.
불행을 견디게 하고,
불공정을 참게 하고,
고통을 미루게 하는 환상.
그 누구도, ‘지금 여기’에서 무너져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망은 항상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쫓는 순간, 인간은 현재를 저당 잡히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자기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결국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산 것이 아니라 기만당한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빛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만,
그 그림자는 잔혹하다.
희망을 품는 자일수록 실패 앞에서 무너지고,
희망을 오래 가진 자일수록 절망의 낙차는 깊어진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그리고 거기서 생은 끊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살은 절망 때문이 아니라, 희망 때문이라고.
희망은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다.
그저 죽음을 늦추는 ‘시간 장치’에 불과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희망으로 봉합하려 하고,
타인은 그 희망을 ‘미덕’이라며 칭송한다.
하지만 그건 칭찬이 아니라 구경이다.
“그래도 너는 희망을 놓지 않았잖아.”
희망은 콘텐츠다.
불행은 컨셉이다.
그리고 그 연극이 끝나는 순간,
관객들은 돌아서고 무대 위의 인간은 정적 속에서 꺼져간다.
희망은 약자의 종교다.
그들에게는 미래 말고는 신이 없기에,
‘나아질 수 있다’는 서사를 신앙처럼 읊조린다.
그러나 신은 구원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게 할 뿐이다.
그래서 희망은 신이 아니라 지옥의 안내자다.
나는 이제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 직시한다.
이 세계의 구조를,
말의 위선을,
감정의 이중성을,
그리고 나 자신이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절망의 인식이 나를 살게 했다.
나는 바닥을 봤고,
거기서 진심을 줍고 다시 걸었다.
희망은 내가 던졌고,
지금 내 손에 남은 것은 무게와 확신이다.
진정한 절망은,
한 번이라도 뜨겁게 믿어본 자만이 가진다.
희망을 노래하는 자들이
자신이 어떤 고통을 유예시키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긍정’을 가장해 타인을 억압하고 있는 그 광경을 보고 있다.
희망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만 허락된 독이다.
죽은 자는 희망을 가지지 않고,
산 자는 그 희망에 질식당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는 그 중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