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끝

시실리아에서.

by somewhere

비가 내린다. 종일ᆢ

그래서 여행의 마지막 도시였던 시실리아의 시라큐스 여행을 포기하고 종일 카타니아 숙소에 있었다.

한 달여 동안 늦게 일어나본적은 없는 것 같다.

낮에 많이 걷고 늦게 잠이 들어도 아침이면 눈이 퍼뜩 떠져 여행을 계속해왔다.

처음으로 오늘 늦도록 누워있었는데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한다.

부러 늦게 일어나고 늦게 아침을 해 먹고 커피도 오랫동안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길게 했다.

비가 아주 많이 온다는 예보에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닌지라 많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아무것도 예상되거나 짐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진 뉴스가 나고 한국에서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받으니 이리저리 여행 말미의 심란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너무 긴 여행이었다. 27일 이라니ᆢ

보통 여행 초기에 집을 멀리 떠나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한 번씩 오는데 이번엔 여행이 길어서인지 끝무렵에 안달이 난다.

내가 있던 곳, 내가 살던 그 일상과 루틴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립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싶고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싶고 뚝배기 올려 된장찌개도 끓이고 싶다. 어서 내 까만 피아노 앞에 앉고 싶다.

돌아다니다 보니 이제 이탈리아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껴지는데 시실리아는 도시들 자체가 참 독특하다.

일단 공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오면서 본 도시의 남루함에 놀란다. 많이 가난해 보인다.

팔레르모는 겨울이지만 그래도 관광객이 있어 활기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참 낡고 오래된 허름함이 있다.

시실리아의 두 번째 도시인 카타니아는 더한다.

잠깐 골목하나 들어서면 갑자기 음산해지고 황량한 느낌이 들어 무서움이 느껴지는 곳들이 많다.

시실리아의 도시들은 거의 해안가에 많다.

팔레르모에서 카타리나로 넘어오는 기차는 시실리아 내부를 가로지르는 것이라 시실리아의 속살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도시와는 다른 따스하고 다정한 전원풍광을 볼 수 있다.

겨울이 비수기인지라 관광객이 많지는 않다.

시실리아에 들어와서는 동양인을 거의 못 본 것 같다.

그래도 그동안은 날씨가 좋아서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라는 체팔루나 그리스 유적이 남아있는 아그리젠또를 즐겁게 다니기는 했다.

체팔루 바다로 향한 문

체팔루 ᆢ오래된 바닷가 도시

정말 낡았는데 멋지다.

아그리젠또

아그리젠또 그리스 유적지

콩코르드 신전 앞에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가 날개가 녹아 추락한 이카루스의 청동상이 있다.


어제 다녀온 타오르미나는 지중해를 낀 휴양지 이면서 유적지라 분위기가 남달랐다.

특히 높은 지대에 있던 원형극장은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본 곳 중 가장 마음에 남지 않을까 싶은 곳이다.

폐허가 되어 텅 빈 곳에 바람만 가득하고 무대 사이로 푸른 지중해 바다가 보인다.

기차역에서 내려 거의 산을 하나 오르다시피 해서 다다른 곳이라 그런지 신비한 느낌마저 들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높은 곳에 굳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을까. 그리고 왜 몇천 년이 흐르도록 그 후손들은 그곳에서 그대로 살까.

잦은 전쟁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기 위함이겠지.

주변 마을 주변 나라들과 사이좋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없다.

세상 어느 곳이건 늘 옆에 붙어있는 나라, 가까운데 있는 사람과 싸운다. 즉 관계가 있으면 무조건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평화는 인간 본성에 없는 것일까 ᆢ


시실리.

책속에서 영화속에서 많이 듣던 이름. 시실리아

사도행전을 마무리짓는 바울이 로마 입성하기전 닿았던 시실리의 시라쿠사(시러큐스)

가난해서 오히려 마피아를 의지하기도 했던 곳.


이제 시실리를 떠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불어 비행기가 캔슬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아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오후에 비행기가 뜨는 것 같다.

바람이 너무 세어 우산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달리 할 일도 없고해서 일찍 공항에 와서 이 글을 쓴다.

밤늦게 로마 도착하면 공항 주변 호텔에서 잠만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것이다.

드디어 우리나라로.

위대한 나의 일상으로.

여행 기간 동안 잠깐씩 나를 무겁게 하는 생각 하나는 이 여행이 과연 내가 집에서 보냈을 일상보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거였다.

내가 집에 있었다면 했을 일들, 충만했을 시간에 비해 과연 이 이탈리아 여행이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

나이가 든 탓인지 나는 계속 집에서의 내 생활의 밀도가 그리웠다.

사치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2023년 내 겨울 한 달을 바칠 만큼 이탈리아 한 달 유람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제 농담 삼아 앞으로 내 인생에 여행은 없다고 했다가 친구에게 지청구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내 맘은 딱 그렇다.

어딘가를 찾아 헤매고 새로운 것을 보고 견문을 넓혀야 성장하는 그런 나이가 아니라서 인지

내 집 주변 천변과 작은 산이 내게 족하다.

그곳에서 맞는 일출과 노을 그리고 햇살이 족하다.

그리고 부대끼는 가족과 부담스러운 일들도 감사하다.

내게 운명으로 주어진 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내게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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