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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where
Mar 23. 2023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지 결국 시간이 나니까 운동을 하는구나…
오천만 국민이 다 하는 것 같은 운동을 안 하고 사니 늘 죄책감 내지는 불안함이 스물거렸는데 나도 이제 어느 면에서 떳떳해졌다.
어제부터 시작했으니 오늘로 2일 차다.
집에서 가까운 호숫가에 가서 호수를 두 바퀴 빠른 걸음으로 걷고 그 호숫가에 있는 운동기구들로 운동을 한다.
늘 지나다니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쓰는 곳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나도 이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기껏 하는 게 걷기 정도였는데 근력운동이란 걸 해보는 거다. 추의 무게를 정하고 뭔가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을 한다.
이런 것이 헬스장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세상에 공공장소에 이렇게 시민들을 위해 놓여있다. 서울이라 그런가…
또 집 앞에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따릉이를 타고 동네 곳곳을 돌아다닌다. 서울이란 데가 차로 다니면 너무 힘들고 걷자니 은근히 멀고 하는데 이렇게 자전거를 여기저기 비치해 놓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작 내가 살고 있는 순천에 이런 자전거 대여 시스템이 있는지를 모르겠다.
자전거를 타면 묘하게 해방감이 느껴지고 즐겁다. 구식의 슬로우 라이프를 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동네 도서관엘 왔는데 이제 저녁이 내리는 시간, 아직도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신기하다.
저렇게 아이들 쟁쟁거리는 소리를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동안은 직장 생활하느라 물론 아이들 노는 시간에 내가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낮에 양파를 사려고 생협을 찾아가다가 문득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 대도시에서 자전거를 타고 장을 보러 나가는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저 익명의 한 사람으로 양파를 사러 간다.
정말 내가 학생들 앞에서 웃기고 화도 내고 잔소리도 하고 설득도 하던 교사였던가. 그 삶이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냥 한낱 무명 씨가 된듯한 이상한 상실감이 잠시 스친다. 막 퇴직한 동료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희안한 자격증들을 따는 것을 많이 봤다.
아무도 아닌 무명 씨와 뭔가였던 유명 씨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어떤 과정들이었을까?
나도 뭔가 해봐야 되나 싶어 이리저리 봤더니 정말 나는 내가 그 어느 것에도 별 자격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교사를 할 때도 유행처럼 번지는 어떤 취미생활이나 자격증 (상담교사, 진로교사 등등) 갖추기 들이 많았는데 나는 한결같이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안 가졌었다. 그냥 오로지 음악교사로서만 살았다. 단 담임을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다양한 심리 상담연수들은 많이 들었지만.
그것도 공적인 어떤 증명서가 되어 나타나는 과정들은 잘도 피해 다녔다.
세상은 정형화된, 혹은 정량화된 어떤 표식으로 사람을 가름할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갖춘 게 없다.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을 듯 모든 것이 싱거워 보였는데 뭐든 제대로 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냥 평생 음악 듣고 책 읽고 아이들과 씨름하며 산 게 다인 인생이었다.
서울 딸아이 집에 와서 잠시 지내다 보니 이 아이에게 맛있는걸 먹이는 궁리만 하고 있는 나를 본다.
순천에서 거의 요리는 안 하는 내가 여기서는 갖가지 재료를 사다 놓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작은 빌라에서 바쁘다.
딸아이 집에는 전자피아노가 있다. 순천집에는 40년 된 피아노가 있지만.
전자피아노는 하얗고 예쁘지만 기계일 뿐이다. 치다 보면 정말 손목이 아프다. 하지만 볼륨을 조절할 수 있어 늦은 밤에도 칠 수 있는 것은 좋다.
피아노치다 가방에 책을 넣어 따릉이 타고 동사무소 2층 도서관엘 왔다.
그동안 막연히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가 있었는데 포기했다. 그래서 속이 쓰린 저녁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냥 혼자 독학으로 책으로 읽어보자라고 달랜다.
모비딕을 읽는 중인데 작가 허먼 멜빌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이 사람은 포경선 선원까지도 했던 사람이다. 말하자면 가장 거칠고 험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인데 이런 책을 썼다. 모비딕을 읽자면 허먼 멜빌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경이롭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구약의 예언자 같았다가 시인 같았다가 ᆢ세상 곳곳을 다 돌아다녀본 사람의 깊고 이상한 신비가 느껴진다.
그 많은 것을 멜빌은 학교나 어떤 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얻은 것 같지 않다.
도서관을 우주처럼 드나든 고래, 그 사람이 허먼 멜빌이 아닐까.
나는 백지처럼 빈 채로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당분간은 낮에 자전거 타고 양파 사러 다니고 동네 어르신들과 같이 운동기구의 차례를 기다리며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