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비 온 후 뽑는 상추의 촉촉함과 흙속에서 딸려 나올 때의 연한 묵직함을 미안함으로 돌린다. 연신…
미안하다 미안하다.
문 앞 그 작은 흙더미를 기어이 밭으로 만들어 놓은 시어머니.너무 말라 안쓰럽지만 병원에 입원하시면 마치 빠질 살이 있었다는 듯이 더 빠져 뼈만 남으시는 시어머니.
그러다 회복하시면 다시 원래 마른 상태로 돌아오신다.
어버이날이라 옷을 좀 사드릴까 싶어 백화점을 기웃거리지만 그 화려한 곳에선 시어머니께 맞는 옷이 없다.
그 앙상한 몸에 맞는 옷이 없다. 시어머니 옷은 시장에서 사는 게 맞다. 그래서 너무 잘 아시는 시이모님이 늘 시장에서 사다주시는 듯하다.
결국 나는 봉투에 돈을 담는다. 이 돈을 가지고 어머니가 어디 가서 돈을 재밌게 쓰시겠는가 만은 그래도 봉투에 돈을 담는다.얇은 봉투지만 눈에 아주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나온다.
귀가 살짝 멀으셔서 크게 외치듯 이야기한다. “ 어머니, 오면 반갑지만 갈 때는 서운하시죠?” “ 응~~ 그래야… 자식들이 다 그래”
마른 얼굴에 웃음을 귀에 걸며 말하신다.
한 때는 그 구불구불 시골길이 너무 지겹기도 해서 언제까지 이곳을 다닐 것인가 심란하기도 했지만, 오늘도 그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서 왔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어스름이 깃들 때 어머니를 문간에 세워둔 채로 떠나온다.
돌아가실 고비를 자주 넘기시는 어머니. 깡마른 채로 늘 아프시며 언제나 다시 일어나시는 어머니의 몸이 불가해하기도 했다.
젊은 날부터 곧 죽을 거란 소리를 들었다는 어머니, 이제 85세다. 엊그제 팔순잔치한다고 여수 가서 바닷가 레일 바이크 탄 것 같은데 벌써 다섯 해가 지났다. 코로나 때는 남편이 등에 업어 병원으로 가곤 했다. 곧 돌아가실 것 같던 그 어머니가 또 손바닥만 한 땅을 일구어 상추와 시금치를 심어놓으셨다.
퇴직하고 제법 요리를 하며 살고 있는 나는 이제야 비로소 진짜 해먹을 욕심에 상추와 시금치를 뜯어왔다.
그 순하고 연한 흙속에 묻힌 상추와 시금치를 뽑아내는 느낌이 아직도 손끝에 남는다.
무엇이 어머니를 자꾸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흙속에서 자라나는 씨앗들 때문인지 모른다.
어머니는 걸을 수만 있으시면 땅에 나아가 씨를 뿌리신다. 지팡이를 짚으시고 밭으로 나가시면 무를 뽑는 힘이 나보다 세다.일에 서툰 나는 금방 주저앉지만 지켜보다 갑갑해서인지 어머니가 들어서면 순식간에 무가 뽑힌다.
나는 늘 그것이 불가해하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지… 병원에서도 포기한 듯한 어머니가 다시 집에 돌아오시면 어디서 힘을 받아 저렇게 밭을 일구시는지, 뭔가 신비한 힘이 어머니 속에는 있는 것 같다.
씨앗을 키워내는 땅과도 같다.
피부는 늙고 늙어 거뭇한 거죽만 남고 이빨도 많이 불편하시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이 너무 해맑다.
어머니가 늙었다는 게 느껴질 때는 한 이야기를 계속하실 때이다. 오늘 그리도 좋아하시는 장손자를 봐서인지 그 아이 어려서 물장구치던 이야기, 다라이 속에 물 채워 아이 앉혀놓고 동네 할미들이 모두 나와서 웃으며 봤다는 그 이야기를 세 번쯤 하신다. 아마 일어서지 않았다면 이십 분 텀으로 무한정 계속될 것이다.
없던 말씀이 느는 것, 그것이 늙으신 표시다. 하염없이 이야기를 하신다. 이야기하고 웃으시고 손주를 바라보면 예뻐서 그 어릴 때 모습이 다시 떠올라 이야기하고 조금 있다 보면 또 생각나또 이야기하신다.
그 예쁜 모습이 자꾸 떠오르니 얼마나 행복하실 것인가.
어머니, 그 행복한 순간순간이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되어 외롭고 외론 밤에도 계속 웃으소서.
내 어여쁜 살붙이들이 잠시 왔다 가서 허전하고 쓸쓸한 공간에 텔레비전 소리로 좀 채우다가 잠드시면 또 무한 플레이로 손주 물장구치던 다라이속에 같이 손뼉 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