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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Oct 20. 2023

비 내리는 리스본

페르난두 페소아

비가 엄청 내린다.

12시가 되는 걸 보고 침대에서 일어나 페르난두 페소아 집이라도 가보려 내려왔는데 엄청나게 쏟아붓는 비에 호스텔 로비에 주저앉는다.

어제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 몸이 으슬 으슬 아파와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돌아와 일찍 잤다.

동행들은 가톨릭 성지라는 파티마로 갔고 나는 감기를 핑계로 하루 쉬기로 했다.

오전 내 딩굴거리다 페소아 기념관이라도 가볼까 했더니 악수비가 쏟아진다. 그냥 로비에서 노닥거리는 것도 좋다. 로비 구석지 바에서 비 오는 날 딱 듣기 좋은 음악을 계속 흘려보낸다. 감기만 아니면 바에 가서 와인이라도 한 잔 하고 싶다. 술이 감기에 좋다는 소리를 언제 한 번이라도 들어봤다면 좋을 걸 ᆢ

어떤 청년은 우산을 펼쳐 들고 나선다. 튼튼한 우산이다. 바람만 불어도 까바지는 내 우산으론 택도 없다.

 다행인가 ᆢ

배가 슬슬 고파져 가까운데 있는 중국슈퍼에서 라면을 사볼까 하고 나가다 바로 철수했다. 비가 너무 거칠게 온다.




페르난두 페소아.  < 불안의 서 >중에서


엎드려 울 수 있는 무릎, 거대하고 형체가 없고 한 여름밤처럼 드넓은, 그러면서도 아늑하고 따뜻하고 여성스러운, 어느 난롯불 옆의 무릎..... 생각할 수 없는 것들과, 뭔지 모를 실패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일으키는 안타까움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소름 끼칠 정도로 엄청난 의심을 떠올리며 그 무릎에 기대어 울어봤으면.,.,


나의 인위적인 생각들을 깨끗이 없애고 지혜를 다 모으고 애정을 담아서, 입 맞추고 싶도록 소중한 장난감인 단어와 이미지와 문장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으면 나는 크고 슬픈 방, 심오하도록 슬픈 방에서 철저히 혼자이고 너무나 작고 나약한 존재가 된다...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난다.

나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을 이미 다 보았다.

나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이미 다 보았다.


여행은 느낄 줄 모르는 이들이나 하는 것이다.


병적인 감성을 지닌 항해자인 우리는 이렇게 말하리라.

인생을 살 필요는 없으며 느낄 필요만 있다.


여행은 무엇이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든 석양은 그저 석양일 뿐인데 그것을 보러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필요는 없다.

여행을 하면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나는 리스본을 떠나 벤피카에만 가도 자유를 느낀다.

( 벤피카: 리스본 근교 30분 거리 지역)


리스본을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사람이 전차를 타고 벤피카까지 간다면 마치 무한대로 가는 여행처럼 느낄 테고, 어쩌다 신트라(리스본에서 기차 한 시간 거리 근교 )까지 가는 날에는 마치 화성에라도 가는 기분일 것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는 여행자는 길을 떠나 5천 마일 이상을 가면 새로운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데, 항상 새로운 것만 마주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 계속되는 일상의 일부가 되고, 두 번째로 발견한 새로움 이후에는 새로움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존재가 단조롭지 않도록 존재를 단조롭게 만들자. 지극히 무미건조한 것들로 일상을 채워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재미나게 하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모든 것이 되는 상상을 할 수 있다.

                                                    - 불안의 서 -



오후 두 시쯤 비가 잦아들어 우산 쓰고 리스본 명물이라는 노란 28번 트램을 타고 페소아가 죽기 전까지 살았다는 집엘 갔다. 울퉁불퉁 돌길에 오르락 내리락 경사진 골목을 지나, 걷는 것과 같은 시간으로 도착한다.


페소아는 76 여가지의 이름을 사용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 한 캐릭터에 생년월일과 용모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그 캐릭터가 글을 쓰는 것처럼 자신이 글을 썼다.


How many am I?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있는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어 구체적으로 그 인물이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장치가 되어있는 코너도 있다.

페소아를 설명하기 위해.


여행 와서, 여행에 대해 대단히 시니컬하게 말하는 페수아에게 전폭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나는 페소아처럼 너무 많은 내가 있는 것인가.


흘깃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페소아는 체코의 카프카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우리나라 김수영을 떠올리게도 한다.

너무 외로웠던 사람 같다.

이런 작가가 생전에 너무 가난하게 살았다는것이 마음이 아프다.

내가 가난하지 않다는 것이 뜬금없이 부끄러워진다.

페소아가 죽은 후 침대 머리맡 나무 상자 속에 쌓여있던 글들은 아직도 정리 중이라 한다.

생전엔 5권의 책이 출판 되었을 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 불안의 서> 중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적막한 내 방에서 홀로 서글픈 심정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목소리가 혹시라도 수많은 목소리들의 본질, 수많은 삶들이 열망하는 자기표현, 그리고 일상에 매인 운명, 부질없는 꿈과 가능성 없는 희망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영혼들의 인내심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나의 심장은 힘차게 고동친다. 삶이 고양될 때면 더욱더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페소아 초상


죽기 전 날 병원에 실려 간 페소아가 마지막으로 썼다는 문장

I know not what tomorrow will bring.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지 나는 모른다.


천천히 숙소까지 걸어 돌아오며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고 햇볕이 비치면 점퍼를 벗고, 수탉이 비둘기처럼 노니는 공원을 만나면 벤치에 잠시 앉으며 지도가 가리키지 않는 깊은 골목길로도 빠졌다가 돌아 돌아 왔다.

I know not what next moment will bring.


오늘은 아파서 오롯이 페소아만 생각하며 지내기 좋은 날이었다.

리스본의 골목길들 ᆢ잊지못할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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