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피어있는 원성동의 능소화

45년 만에 가 본 원성동 이야기

by 경자의 서랍


잊고 싶은 기억



형편이 어렵던 우리는 이사를 많이 다녔다. 세 곳이나 옮겨 다녔던 원성동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어린 시절을 많이 보냈다.


우리는 그 동네에 살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와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살았다면 엄마도 나도, 상대적으로 느끼는 빈곤감이나 박탈감은 덜 했을 것이다. 그 동네에는 70년대 가난한 동네를 떠올리게 하는 술 취한 아저씨도 없었고, 그런 남편과 싸우는 억센 엄마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꾀죄죄한 아이들이 골목에 나와 뛰어노는 그런 풍경도 없었다.


아침이면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출근을 했고, 엄마들은 찬거리를 사러 시장이나 다녀올 뿐 하루 종일 골목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다락방이 있는 미니 이층 집을 새로 지은 곳이 두어 집 있었으나, 동네 대부분 집들은 비슷한 구조였다. 대문을 열면 화단이 있는 작은 마당이 나오고,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루를 중심으로 두어 개쯤 방이 있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부뚜막과 바닥에 타일을 깔고 연탄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고, 작은 환기창이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마당 한쪽에 따로 있었다.


셋방에 사는 집도, 셋방을 주는 집도 드물었다. 우리가 세를 살던 곳은 주인집이 집 앞 작은 공터를 이용하여 세를 줄 요량으로 방과 부엌을 나란한 모양으로 벽돌을 쌓아 허름하게 지은 것이다. 따로 대문은 없었지만 주인집 대문을 열면 우리 집과 경계가 되는 벽돌로 쌓은 담장 오른쪽으로 우리 집이 있었다.


주인집에는 딸이 셋이나 있었다. 큰 딸이 나보다 한 살 어렸고 둘째가 동생과 나이가 같았다. 대문을 함께 사용하면서도 왕래가 없는 먼 사이였다. 딸 셋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낳은 아들 이름이 '인호'여서 지금도 원성동 이야기를 할 때면 '인호네 집 살 때' 또는 "뚝방에 살 때'라고 말한다.


돈을 내는 수학여행도 가본 적 없고, 돈을 내야 하는 우유와 빵 급식도 먹어 본 적 없다. 체육복을 사지 못해 가을 운동회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 나와 다르게 학교 다녀온 후에 피아노 배우러 다니는 친구들이 있는 동네였다. 교과서보다 큰 사이즈의 바이엘이나 하농, 체르니 같은 비닐 커버가 있는 피아노 교본을 옆구리에 끼고, 여자애들은 긴 머리를 찰랑 거리며 다녔다.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같은 월간지도 학교에 가지고 와서 보았다.


다른 세상에서...


우리 집은 항상 다른 세상이었다. 불행하게도 잔소리를 듣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서너 시간 동안 계속되는 잔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빛바랜 싸구려 분홍색 벽지 무늬의 맞지 않는 이음새를 멍하니 바라보거나, 아물고 있는 무릎 상처의 딱지를 뜯어내고, 왼쪽 손목 가운데 난 작은 사마귀를 쥐어뜯어 피를 내기도 했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은 방음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소리만 들어도 밖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잔소리의 마무리를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기다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얼마나 야무졌는지, 동네 사람들이 내 꺼는 똥두 버리기 아깝다구 그랬어, 으응? 사람이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구, 나는 어려서두 저렇지 않았는디.. 쟤는 나를 하나두 안 닮아서는... 누굴 닮았것어, 내가 씨 못 받을 종자 씨를 받은 거지.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여.. 나 좋다구 씨 못 받을 종자랑 붙어서 저런 걸 낳아버렸으니.. 내가 누굴 탓하것어.

부모복 없는 년은 남편 복두 없구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두 없다는 옛말 그른거 하나도 없는겨. 부모복 없는 년이라 남편 복두 지지리 없어 이렇게 사는디 어디 자식복이라구 있것남? 건너다보니 절터더라구, 내 팔자는 안 봐두 뻔하다니께~“


지금도 내 귓가에, 음성파일로 저장된 것이 재생되는 듯 생생하게 들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 이북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말투, 상스럽고 천박한 표현들, 말끝을 올리며 누군가의 공감을 유도하는 듯 으응? 으응? 하던 소리, 토씨 하나까지도 기억난다. 나를 불안하게 하던 밥그릇과 물건들을 험악하게 다루는 ‘뎅그렁 우당탕’ 소리와 함께.


그렇게 내가 쓰던 작은 골방에서 세상을 다 살아낸 늙은이처럼 외롭고 지친 사춘기를 보냈다. 가끔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면 혀를 차며 말했다.


"느이 엄마는 왜 그런다니. 자식 악담해서 뭔 좋은 꼴을 보것다구.."



다시 찾은 원성동


작년 여름, 무덥던 어느 날 원성동에 갔다. 맛집을 추천받아 갔다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생각지도 않게 둘러보게 되었다. 마침 그곳이 어린 시절을 보낸 원성동 집 근처였다. 작게 축적된 지도 속으로 들어온 듯, 어릴 적 기억과 사뭇 다른 크기로 다가오는 옛 동네는 지나온 시간만큼 낯설었다.


멀었던 골목 저쪽 끝이 너무 가깝게 빤히 보이는, 내 기억처럼 낡고 오래된 동네에서 혜란이 이모가 하던 만홧가게는 어디쯤인지 가늠도 어려웠다. 내가 살던 집은 헐어내고 새로 집을 지은 듯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고, 큰 마당이라 부르던 넓은 공터는 아파트 귀퉁이에 있는 놀이터만큼 작았다. 곳곳에 몰락하는 여느 동네들처럼 운명을 점쳐 준다는 무당집의 하얗고 붉은 깃발이 대나무 장대 위에서 펄럭거렸다.


곧 재개발을 할 거라는 소문처럼, 군데군데 비어버린 골목에는 빈 들판처럼 개망초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낡은 것을 감추려고 그려놓은 벽화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다.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동네 골목을 빙빙 돌다가 보았던 담장 너머까지 늘어진 생선가게 아저씨네 주황색 능소화가 그때처럼 담장 너머로 피어 있었다. 그 무렵의 엄마보다 훨씬 늙어버린 내가, 그곳에서 그 꽃을 다시 마주하면서 그때의 나로 돌아간 듯 가슴 먹먹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지금 내 핸드폰 속에 그날 찍은 원성동 골목의 능소화 사진이 들어있다.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 같은 나의 어린 시절 원성동에서의 기억과 함께...


20170630_120636.jpg 벽화가 그려진 원성동 골목
20170630_121347.jpg 빈 들판처럼 개망초꽃이 부질없이 피었다.
옛날처럼 좁은 골목까지 늘어진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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