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어디다 써먹는다니?

혜란이 이모네 만화가게

by 경자의 서랍


혜란이 이모네 만화가게




원성동에는 우리가 큰 마당이라고 부르는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는 혜란이 이모가 하는 간판도 없는 작고 허름한 만홧가게가 있었다. 큰 마당이 보이는 쪽 집 한편을 헐어내어 벽돌을 쌓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만든 작은 가게였다. 윗부분이 유리로 된 문을 덜컹거리고 열면, 겨울에는 가게 가운데에 작은 연탄난로가 있었다. 그 위에는 김이 올라오는 번데기 솥이 올려져 있었고 그것을 퍼주는 국자 틈새로 항상 구수한 냄새가 만홧가게에 가득했다. 한 편에는 구들을 네루식 아궁이로 데우는 온돌이 있고 혜란이 이모는 항상 그곳에 누워있었다.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자주 그곳에 갔다. 나를 향한 엄마의 이유 없는 신경질이 잠잠해지면 아버지는 종종 엄마 몰래 용돈을 주었다. 그 돈으로 만홧가게에 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였던 셈이다.


만화는 대게 완판이 상, 하 두 권이거나 또는 상, 중, 하 세 권이었다. 만화책은 벽에 고무줄로 넘어가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인기가 없는 것은 높은 곳이나 구석에 있었고 인기가 있거나 새로 들어온 만화는 눈높이의 손이 잘 닿는 곳에 있었다. 나는 만화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려고 내 옆에 돈을 낸 만큼 빼어놓은 만화를 혜란이 이모가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얼른 보지 않은 다른 만화책으로 바꿔놓았다. 그렇게 하면 볼 수 있는 만화책이 두어 권쯤 많아졌다. 어설픈 내 행동을 혜란이 이모가 모르는 채 눈감아 준 것이라 지금은 생각한다.






어쩌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 뒤에 커다란 박스를 싣고 가는 청룡당 만홧가게 아저씨를 보면 나는 가슴이 뛰었다. 학교 정문 근처에 있는 청룡당은 규모가 큰 만홧가게였다. 그곳 아저씨는 일주일에 한 번쯤 작은 만화가게를 돌면서 새로 나온 만화를 다른 곳에 있던 만화와 바꾸어 주는 일을 했다. 그 아저씨가 다녀갔다는 것은 혜란이 이모네 만홧가게에 새로운 만화가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가끔 청룡당까지 가기도 했다. 넓은 그곳에는 내가 보지 못한 만화들로 가득했고, 만화뿐 아니라 만홧가게 한 편에는 낡은 표지의 무협지도 꽂혀 있었다. 손님들 중에는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나 어른들이 있기도 했다. 무협지는 학교와 이름을 적으면 며칠 동안 대여를 해 주기도 했다. 한 번에 다 읽기에는 세로 활자였던 책은 두꺼웠고 그것 또한 한 권짜리는 드물었던 까닭이다.


중학생 이상에게만 대여가 가능했던 무협지는 초등학생인 나는 볼 수가 없었고, 오빠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무협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 허무맹랑하게 과장된 무술 장면이나 제법 수위가 높았던 애정 표현의 묘사는 내게 새로운 호기심과 재미를 주었다. 만화책보다 오래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청룡당에서 만화에 빠져있던 어느 날, 나를 찾으러 그곳까지 엄마가 왔다. 한 번만 더 이곳에 오면 학교를 못 다니게 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나는 손목을 잡혀 질질 집까지 끌려오다시피 했다. 그 일 이후로 아쉽지만 나는 청룡당에 발길을 끊어야 했다.



“경자야! 니 엄마 온다.”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것을 아는 엄마는 내가 보이지 않으면 만홧가게로 나를 찾으러 왔다. 엄마가 오는 것을 혜란이 이모가 먼저 보면 만화에 빠져있던 나를 안채와 통한 뒷문으로 나가게 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못 찾고 돌아가는 것을 문 뒤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곤 했다.


나를 찾아온 것은 엄마가 신경질을 부릴 꼬투리가 필요한 때였다. 엄마는 욕을 하거나 때리지는 않았지만 자기 연민에 찬 신세한탄을 우당탕 소리를 내며 거칠게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면서 자신이 불행한 것이 모두 나 때문이라는 듯 나를 향해 오랫동안 떠들었다.

“나 좋다고 붙어서 너 같은 걸 낳으니께 나두 할 말은 읍지만 누굴 닮았는지 생긴 것부터가 하나두 맘에 드는게 읍으니.. 도대체 는 어디다 써먹는다니~ 만홧가게두 한 번 가지 말라구 하믄 가지 말어야 할거아녀~ ”

너무 마르고, 못생기고, 게으르기까지 해서 써먹을 데가 한 군데도 없다고 어려서부터 들어온 엄마의 비난은 지금까지 내가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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