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빌런 2

건강검진 하던 날

by 경자의 서랍




벌써 이 년 전 일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하는 '건강검진'을 하러 갔다. 수면 내시경을 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았다. 마땅히 보호자 노릇을 시킬만한 사람이 없었다. 내 빈한(貧寒)한 인간관계의 한계였다. 병원은 규모가 컸고 건강검진은 2층에서 이루어졌다.



접수를 하자 옷을 갈아입으라는 안내가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검진센터는 한산했다. 탈의실은 밖에서 보기보다 협소했고, 목욕탕 축소판 같은 옷장이 나란히 있었다. 병원이라서 일까? 문에는 잠금장치도 없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검진을 위한 가운은 헐렁하니 사이즈가 컸다. 다양한 사람들이 오는 만큼 일일이 체격에 맞추어 옷을 준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웃옷은 여밈이 끈으로 돌려서 묶게 되어있었고 하의는 고무줄 바지였다. 나는 얼른 벗은 옷을 빈 옷장에 넣고 열쇠로 문을 잠갔다. 그리고 열쇠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처럼 건강검진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혈압과 키와 몸무게등 기본적인 것을 마치고 채혈을 하기 위해 채혈실 앞에 있는 의자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모두 나와 같은 헐렁한 검진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건너편 의자에는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생각 없이 그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색의 가운을 입고 있던 거였다. 하늘색에 병원마크가 찍혀있는 것과 오렌지색에 병원마크가 찍힌 가운이 그것이었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하늘색 가운이었다.



쎄한 기분이 가슴을 쿵하고 내려앉게 했다. 혹시 검진용 가운에 남자와 여자용 구분이 따로 있는 건가 싶었다. 병원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을 유난히 살펴보았다. 맞는 거 같았다. 하나같이 남자들은 하늘색 가운을, 그리고 여자들은 오렌지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럼 나는 왜 하늘색 가운을 입고 있는 걸까? 혹시!!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살짝 풍기던 담배냄새가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소변검사, 골다공증 검사, 시력과 청력검사, 심전도 검사, 흉부방사선 촬영등 이것저것 하는 것도 많았고 그만큼 병원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가운에 남과 여의 구분이 있고 혹시 내가 남자용 가운을 입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불편해지고 사람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병원 간호사들은 잘못된 거 라면 왜 알려주지 않는 걸까? 가운 따위는 건강검진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일까? 예민한 나의 괜한 걱정인 걸까? 그러면서도 소심한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검진이 끝나고 담당 의사 선생님과 면담만 남았다. 옷을 갈아입고 대기하라는 간호사 안내에 나는 탈의실로 갔다. 내가 처음에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실 문을 열려는 순간 나는 보았다.


'남자 탈의실'


선명하게 문 위에 붙어 있었다. 왜 아까는 안 보였을까? 여자 탈의실과 나란히 있었는데 왜 나는 남자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던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 중간이었고, 잠금장치도 없었고, 누군가 옷을 갈아입는 중일 수도 있었고, 내가 갈아입는 중에 누군가 들어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는 문 앞을 지켜줄 보호자도, 남에게 부탁할 주변머리도 없었다.


그날 얼마나 긴장과 불안 속에 옷을 빨리 갈아입었는지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실수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2주쯤 지난 뒤에 우편으로 받아 본 검진결과는 다행히 나쁜 곳 없이 다 좋았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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