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묵상#2
*전세계 주요 교회교단들의 협력으로 채택된 교회력에 따르는 성서일과는 구약성서, 서신서, 복음서로 구성되어있다.
Deuteronomy 4:32-40
as the LORD your God did for you in Egypt before your very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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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earth he showed you his great fire, while you heard his words coming out of the fire.
2Chrithians 3:1-18
And all of us, with unveiled faces, seeing the glory of the Lord as though reflected in a mirror, are being transformed into the same image from one degree of glory to another; for this comes from the Lord, the Spirit.
Luke 16:1-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And his master commended the dishonest manager because he had acted shrewdly; for the children of this age are more shrewd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are the children of light. And I tell you, make friends for yourselves by means of dishonest wealth so that when it is gone, they may welcome you into the eternal homes.
오늘의 본문들은 꽤나 흥미롭다. 바로 세 본문 모두 보는 것(시각적)과 믿는 것(신앙적)인 문제의 연관성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첫번째 본문인 신명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미 여러차례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이는 방식으로 구원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다. 모세를 통한 구원의 기적을 눈앞에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있다. 그들에 대해 예언자는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지금까지도 시각적인 것들을 활용하여 구원의 약속을 상기시켜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본문이다.
고린도후서에서는 그러한 구원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해 '베일이 마음을 덮은'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베일을 벗은 모습으로 거울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차원의 모습은 같은 이미지 처럼 보일지라도, 성령에 의해서 행해지는 일이기에 변혁적인 차원의 전혀 다른 상태로 변모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눈 앞이 뿌옇게 된 상태에서 거울을 보게 되면 내 모습은 희미하게나마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맑은 눈이 된 상태로 내모습을 보게되면 그 전과는 같은 이미지가 눈앞에 보이더라도 전혀 다른 상태의 내가 보이게 된다. 이는 단지 표면적인 시각적 효과때문만은 아님을 의미한다. 성령에 의해 눈이 뜨여진 자는 자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본문인 누가는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내용으로, 해석이 난해하고 어렵지만, 이 역시 시각적인 힘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가장 잘 다루어주고 있다. 언뜻 표면적인 문자들을 읽기만 한다면,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를 왜 칭찬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설명들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본문은, 신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태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함을 알 수 있다. 주인의 것을 정당하게 셈하지 않고 빚진자들에게 빚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주는 청지기의 자세는 윤리적인 잣대로 보면 분명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본문은 청지기 행동의 불의함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바로 재물의 속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재물 자체가 불의함을 의미한다. 청지기가 거짓말을 하여 주인에게 손해를 입혔음은 분명하지만, 이 이야기는 주인의 재산에 해를 입힌 청지기를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고 있다. 불의한 재물의 기원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당시의 역사사회적 상황으로 추정컨데, 높은 고리대금이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빚탕감은 신앙적인 행위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빚을 짐으로인해 남의 재물에 해를 입힌 것 자체를 현재적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성서에서는 재물의 속성 자체가 얼마나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여기서 재물은 비단 돈이 아닐것이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의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부정의 부정인 셈이다. 불의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재물자체가 불의하기에 그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의 차원의 영역을 벗어나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해주는 태도를 취하라는 의미이다. 그리하면 일시적인 안락한 건물뿐인 집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처소로 인도 된다는 이야기이다.
눈에 보이는 재물에 대해 분명하게 불의를 외치는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그에 현혹되지 않는 자들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차원의 집에 거할 수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믿으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구약의 하나님은 늘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스스로의 약속을 드러내신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의 약속으로써의 안식처를 이해하는 특별한 방법론은 철저히 성령에 의해, 눈에 보이는 자기이익에 사로잡힌 행위들로부터 베일을 벗겨내어야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에만 맘몬이 아닌, 하나님을 믿게 될 수 있고, 영원한 안식처로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시각은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하고 있는지, 혹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하게 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