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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하는 돌멩이 May 27. 2021

진리의 방법론

하루묵상#1


*전세계 주요 교회교단들의 협력으로 채택된 교회력의 성서일과는 따라서 주어진 구약성서, 서신서, 복음서로 구성되어있다.


Deuteronomy 4:15-24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 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2 Corinthians 1:12-22 "예수 그리스도는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따름입니다."

Luke 15:1-10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세 본문은 각각 다른 스토리이지만, 연결되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진리를 구하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첫번째 스토리인 신명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형상'을 세우는 행위가 인간의 부패와 관련되어 있음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다. 형상이라는 것은 이미지를 말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관념들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형상화라는 보이는 방법을 택한다. 쉽게 말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눈에 보이도록 구체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어라는 것도 형상화의 한 예이다. 언어가 없이는 인간은 그 무엇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다. 물론 언어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형상화라는 것 자체는 인간에게는 중요한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형상화에 대해 거친 비판을 하는 것일까?


본문에 나온 우상이라는 개념은 형상화 자체가 아니라, 고정된 형상화를 믿음의 체계로 환원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상을 섬기는 행위는 무언가의 틀에 갖힌 신을 창조하고 그것에 모든 가치체계를 투영하는 행위인 것이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우상금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그의 사유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신은 결단코 생각을 고정시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의 본문인 고린도후서의 예수에 관한 묘사는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진리를 따르는 예수는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분명하고 고정되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앞선 본문에서는 고정된 사유를 부정했는데, 이번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고정된 사유를 추구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진실한 예수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을 전하는 고린도후서의 필자는 고린도교인들이 자신들의 방문 계획에 대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진리를 따르는 예수처럼 본인들도 진리에 따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설득인 것 같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는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의 마음이라고 말하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령의 마음이 무엇이고 예수는 어떠한 진리의 태도를 가지고있는지, 다음의 본문 누가복음을 살펴보자.


마지막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유명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비유를 하고있다.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는, 바로 체제로 부터 소외된 자들을 먼저 들여다 볼 줄 아는 자세임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다. 비록 다른 99마리의 양에 비해 죄가 많은 1마리일 지라도, 그가 당연히 죄에 대한 결과를 받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 손을 건네고 집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리를 구하는 자의 자세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를 찾는 자는 앞선 본문의 이랬다 저랬다가 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한 관점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시되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눈을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명기처럼 이들을 고정되고 낙인시키는 형상을 부여하지 말고, 열린 사유로 사회적 우상의 형태들을 제거하는 진리추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죄라고 구약성서 본문에서 여러번 강조하고있다. 우상숭배는 본문의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질투가 많아서 싫어하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상숭배는 세상을 창조한 의미 자체를 위반하는 행위이다. 창조는 아퀴나스가 말한 것처럼, Out of nothing, 즉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그 누군가의 의미도 무시당해서는 아니됨을 말한다. 소외되고 경시되는 현상을 고정시킨 채, 자기이익에 맞는 것만을 형상화하고 고정시키려는 태도는 그 자체로 우상숭배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과 잃어버린 양한마리를 찾는 진리추구의 확실한 태도는 연결되는 것 같다.


오늘 나는 과연 스스로 만든 우상에 갖혀 나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소외된 현상들이 내 문제가 아니라고 치부하고 그저 넘겨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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