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철학#1
누구나의 청춘처럼, 그저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묻고 답하기에도 분주한 시절이었다. 답을 몰라 방황해왔고 심지어 영영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절망적인 감정까지 들고는 했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받지 못하면 나는삶의 실패자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정체성은 계급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체성에 대한 외적인 규정은 그 사람의 직업, 주거환경, 경제 정치적 위치, 성별, 국적, 신분 등등으로 구성되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될 것이고, 내적인 규정으로는 실현코자 하는 욕망, 관계, 가치관 등등이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것처럼 정체성이라는 것은 지배계급이 만들어낸 역사적 허구이기에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중층적인 요소들을 비판해내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토대 위에서 그것에 규정받지 않는 여러 움직임들에 대한 지식의 번역하는 것이 중요할까?
알튀세르는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정체성 개념을 지우고, 대신에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적 분석에 초점을 맞추어 계급의 역사적 허구성을 폭로할 것을 주장한다. 반면 랑시에르는 정체성들이 갖는 지식의 동등성에 초점을 맞추어 누구나가 만들어내는 정체성을 벗어나는 개개인들의 개별적 움직임들을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정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쪽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기제들을 폭로하며 억압적 사유를 해방하자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끊임없이 들으며 틀지워진 고정관념을 깨자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특정 그룹의 일원으로 고정시켜버리려는 정체성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하는 것에 공통목표가 있다. 알튀세르가 지식인으로써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한 역사적 폭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랑시에르는 탈규범적 정체성들의 움직임들에 동등한 파트너로써 지식인이 아닌 번역가로써 작업을 수행하려 하고있다. 한마디로 말하기와 듣기의 차이인 것 같다. 물론 둘 다 중요한 바이다. 그리고 둘 모두가 제기하는 개별성에 대한 강조와 marginality의 언어역할에 대한 중간장치에 대한 개발의 필요성에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나는 물화된 정체성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두 사람의 공동목표에 관심이 있으며, 그에 대한 상반된 방법론들을 말하는 이 두학자의 의견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근간이 되는 마르크스의 최종 목표를 두 학자의 전제 하에 아래와 같이 발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체성과 사랑, 개인과 보편, 그리고 차이와 동등함을 인정해주는 공동체
아직 내가 풀어나가고 싶은 주제어들이 많지만, 공부해나가다보면 반가운 만남들이 찾아오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