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생활, 차별과 영어부족으로 무시를 당해도 It's okay!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아마 울룰루에서 보낸 날들이 아닐까. 지금도 그렇게 기억될 정도로 나는 그곳에서 많이 힘들었다.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울룰루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고 거의 한 달을 매일 밤 울었다. 그렇게 울다 잠이 들면 다음날엔 몸이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다. 내 평생 들어보지도 못했던 무거운 것들을 매일같이 들어 나르니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을 정도로 팅팅 부어있었고 허리며 무릎이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 나는 말똥말똥 떠진눈으로 한참을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일으켜 지지 않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나가는 순간은 정말 지옥 같았다.
그 당시엔 '존버'라는 말은 없었지만 나는 존버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딱 두 달만 참아보자는 마음으로 가져온 달력에 하루하루를 엑스표를 쳐가면서 매일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내가 20대 초반의 몸뚱이를 갖고 있었다는 것. 아마 그마저도 아니었으면 나는 일을 박차고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젊음'이라는 무기 덕분에 몸의 고통은 제법 적응해 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육체적 고통보다 날 더 힘들게 하는 게 있었다. 바로 정신적인 스트레스였다. 시드니에서 다니는 어학원에서 나름 영어를 잘하는 상급반을 졸업을 했기에 영어는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원어민들 사이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정말 쉽지 않았다.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내 발음을 듣고 대놓고 깔깔대며 웃는 친구들도 많았다.
같이 일했던 한국인 언니가 이곳의 일이 너무 고되다며 일찍 떠나게 되었을 땐 나는 정말 그 부서에서 혼자가 되었다. 동양인은 딸랑 나 혼자였던 그 상황 속에서 나는 고립된 생활에 힘들어져갔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Hey Asian!'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고 심지어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며 나 말고 다른 종업원으로 바꿔달라는 호주 손님들도 있었다. (전혀 못 알아듣지 않았음에도)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잘못 일을 처리해서 매니저에게 불려갔던 날도 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집에 와서 매일을 울면서 보냈다. 매일 밤을 울며 보냈던 하루하루. 그 건조한 사막에서 안 그래도 없는 수분을 눈물로 다 짜내던 그날들, 그럴 때마다 나는 이곳에 온 걸 무척 후회했다.
그래도 나는 버텼다. 후회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일뿐이었으니깐. 그리고 나는 힘든 순간은 지나고 나면 새롭게 올라오는 또 다른 힘든 순간들로 상쇄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 생활이 가장 힘든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니 시드니 생활이 가장 힘들었고 시드니 생활이 가장 힘들었다 생각되었는데 지금 여기 와서 보니 시드니 생활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고 느꼈기에. 그리고 그 순간들은 지나고 나면 하하호호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의 순간이 되었으니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법 버틸만했다. 분명 이곳도 '그땐 그랬지' 정도로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존버의 심정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존버를 하다 보니 나름 베짱이 생겼다.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나 못 알아들었어 다시 얘기해 줘'라고 당당하게 얘기했고 나를 아시안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에게 '내 이름은 써니야!'라고 말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직접 매니저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그러니 매니저도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대답을 했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내가 동양인이라서 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내 자신에게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였던 캐나다 친구는 난 네이티브 인데도 호주 영어를 못 알아듣겠어!라며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건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다. 내가 호주 친구들에게 배운 F단어를 남발할 때마다 '네가 그런 말을 안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주던 그 친구는 지금도 나에게 가장 고마웠던 사람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덕분에 지금도 겉멋 든 영어는 쓰지 않으니! 너무 많이 들어서 머리 아픈 F단어도 쓰지 않게 된 건 그 친구 덕분이다. 쭈구리처럼 혼자 찌그러져 있는 나에게 항상 먼저 다가와 주던 참 마음씨가 착했던 그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날 정도로 고맙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하는 친구들하고도 꽤나 가까워지게 되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며 내 발음이 웃기다며 나를 여전히 놀리긴 했지만 언제 원어민 친구들에게 발음 교정을 받을까 싶어서 내가 직접 찾아가서 발음을 지적받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R 발음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질 수 있었던 건 여기 친구들의 스파르타 교육 덕분 아니었을까.. 하루에 하나씩 R 발음 단어를 내게 숙제로 내주곤 했으니깐.. (완전 스파RRR타!) 그들은 조금도 바뀐 게 없었다. 바뀐 건 나 하나였지만 바뀐 나의 자세, 나의 태도는 환경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줬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아시안!이라고 불렀지만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냥 똑같이 되받아쳤다. 야 캥거루!
그렇게 캥거루 친구들과 하나둘씩 추억이 쌓이기 시작했다. 사막의 하나밖에 없는 공원에서 앉아서 피크닉을 즐기기도 하였고 리조트 내에 하나밖에 없는 클럽에도 자주 놀러 가곤 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내 영어 실력은 꽤나 향상되어 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나는 여전히 영어를 못하는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나의 영어가 급속도로 성장한 건 여기에서 보낸 6개월이 참 많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에 나를 눈물 쏙 빼게 해준 캥거루 친구들 덕분에 나는 지금 R 발음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일까? 당시에 참 좋아던 Roast Almond 초콜릿의 발음을 못한다며 깔깔 웃는 친구들 덕분에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를 로스트 아몬드. 지금도 좋아하는 로스트 아몬드 초콜릿을 먹다 보면 이때 생각이 나서 괜히 웃음이 난다.
모든 순간 환경을 탓하기보단 나를 바꾸면 달라지는 게 참 많더라. 불평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 그리고 그 상황도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다. 이런 마인드로 버텨온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은 힘든 시간을 통해 성장한다고 했던가! 나는 힘든 시간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깊이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분명 힘든 시간은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맞다.
오늘의 스페셜 땡스투는 못되게 굴었던 우리 캥거루 친구들에게 올려야 겠다. 고마워 내 캥거루 친구들아! Thanks m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