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추웠던 바닷가.
LA를 떠나기 며칠 전, 특별한 일정이 없던 우리는 근처의 리돈도 비치로 향했다.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식 횟집이 있고, 매운탕을 맛볼 수 있다는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보고 찜해두었었는데,
마침 펄밋없이 낚시를 할 수 있는 곳이라길래 망설일 것 없이 차를 몰았다.
7월 중순의 한여름이었지만,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옷깃을 파고들며 오싹하게 만들던 칼바람이 불던 곳.
평일 늦은 오후, 공용 주차장은 음산하리만큼 한적했고,
피어의 나무길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린 한산한 길을 따라 작은 상점들을 둘러보며 바다로 나갔다.
찾지 않아도 바로 보이는 곳에 블로거가 말한 한국 횟집이 보였다.
우린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매콤한 음식이 그리웠던지라 매운탕을 시키고, 아이들을 위해 맑은 조개탕을 시켰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비릿한 바닷바람이 왠지 편안함을 준다.
우리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음식은 실망스러웠다.
매운탕 속엔 고등어 같은 비린 생선만 가득 있었고,
조개탕의 조개들은 모래가 씹히고 비린맛이 심해 삼키기 어려웠다.
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제일 맛있었다고나 할까.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식당을 나온 우리는 근처의 작은 상점에서 낚싯대를 빌리고 미끼로 사용할 냉동 오징어도 샀다.
피어의 끝에는 이미 좋은 자리에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꾼들이 즐비했다.
그 사이에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참을 기다렸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고, 찬바람에 손이 시릴 정도였지만, 풍경만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흐릿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이 도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서핑으로도 유명한 곳이라더니, 저 멀리 검푸른 파도도 멋들어지게 부서진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추운 날씨에, 온몸의 세포들이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다.
18년째 더운 나라에 사는 나는, 이렇게 찬바람을 느낄 때면 나의 이십 대가 떠올라 묘한 기분이 되곤 한다.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보며,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이 순간이 더없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바로 옆에서 낚시를 하시던 백인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들은 작은 광어 한 마리와 고등어 한 마리를 잡았다. 물론 잡은 물고기는 사진만 찍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 주었다. 키친이 있는 호텔이고, 잡은 광어가 컸다면 가져다 요리를 해 먹어 볼 수 도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아들은 미니 사이즈 아기들만 잡아 올려 내가 물고기를 요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물속에 떠있는 무언가 눈길을 끌어 자세히 보니, 바다사자 한 마리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낚시군들이 바다에 던져버리는 물고기 내장 같은 작은 조각들을 주워 먹기 위해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미끼로 사용하고 남은 오징어를 잘라 던져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냉큼 받아먹는 녀석!
그리고는 내내 우리 주위를 돌며 더 던져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바다에 이렇게나 흔하게 떠다니는 바다사자라니.... 이미 라호야와 샌프란에서 엄청난 떼의 바다사자들을 보고 오긴 했지만, 봐도 봐도 신기하다.
두꺼운 옷을 입고도 차가운 바닷바람에 코끝이 얼얼해진다.
조금씩 붉어지는 하늘이 참 아름답다.
해가지는 리돈도 비치는 고요하고 우아했다. 짙게 드리워진 구름 아래로 붉게 물들어 가던 하늘...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이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들고, 우린 넋을 놓고 그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해가지는 바다를 뒤로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호텔 풀장에 내려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서 몸을 녹이며 맥주를 마셨다.
한여름이지만, 해가지면 추워지는 이곳.
한국의 여름도 이랬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스물일곱 번의 여름을 보낸 곳인데도, 나는 이미 그 기억을 잊었다.
장마철이면 장대비가 아주 많이 내리고, 장마가 지나고 난 한여름엔 햇빛이 아주 뜨거웠다는 것 외엔...
그 여름밤의 공기가 어땠는지, 찬바람이 불었는지 시원했는지, 여름의 새벽이슬은 차가웠는지 가물 거리는 기억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기억할 수 있는 건, 여름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걷던 길과 한여름 밤바다의 철썩이는 파도소리 같은 것들이다. 그립다... 한국이.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하나 둘 별이 떠오르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간다.
타닥타닥 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참방이는 수영장 물소리가 들린다.
얼굴은 뜨거운 불의 열기로 따뜻하지만, 몸은 차가워진 밤바람에 으스스 한기가 든다.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의 이 시간들이 내 기억에서 희미해지면,
그때 나는 이 순간을 이 소리와 내 몸의 온기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나의 여름날.
새빨간 불빛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