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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at Fiction Nov 22. 2018

첫사랑이 지워지는 시간

제이 

갑작스러운 기억이 나를 삼켜버리기 전에



오늘도 일이 늦게 끝나서 피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쌓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를 나왔는데 비가 쏟아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20분이다. 핸드폰을 꺼내들어 캘린더를 켰다. 빽빽하게 적힌 하루계획. 10시로 적혀있는 ‘집도착’을 나는 10시 20분으로 고쳐 적는다. 그리고 내일 일정을 살펴본다. 5시 50분 기상. 6시 21분 버스 탑승. 7시 15분 회사 도착. 


버릇처럼 캘린더 확인을 끝내고 다시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우산이 없는 나는 회사 입구에 서서 멀찌감치 있는 버스정류장을 바라본다. 비가 와서 버스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번호가 비슷해 무작정 뛰어가서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아 이제 노래 좀 들으면서 편히 가볼까 하는데 내가 타야할 버스가 아니다. 162번을 타야하는데 이놈의 비 때문에 163번을 탔다. 나를 탓하기도 전에 비를 탓하며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발견한 큰 나무 덕에 비 맞은 생쥐 꼴은 면했고, 나뭇잎들이 비를 막아주는 동안 건너편의 정류장을 찾아 헤맨다. 둘로 나뉜 긴 신호등 중간에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버스정류장을 발견하고는 버스가 올 것 같다는 두려움에 신호가 바뀌자마자 뛴다. 신호등에 다다르고 이제 건너기만 하면 되는데, 어쩐지 신호등이 낯이 익다. 




정확히 말하면 신호등이 아니라 이 길이 익숙하다. 신호등의 반만 건너면 되는데 뛰던 내 걸음이 서서히 멈춘다. 내 눈에 건너편의 커피숍이 보인다. 깜빡거리는 초록불 신호등을 보고는 다시 한걸음을 내딛으며 중간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하지만 한 동안 듣지 못해서 기억 깊숙이 묻어 두었던 소리. 딸랑.  

내 걸음에 맞춰 딸랑 딸랑


그리고 떠올랐다. 
제이의 얼굴이. 


비를 피해 들어갔던 커피숍. 마주보고 있는 우리 둘


갑작스런 생각에 몸이 굳은 듯이 두 신호등 사이에 멈췄다. 

계속 비를 맡던 나의 머리카락들은 더 이상 흡수가 불가능했는지 앞머리를 타고 한 방울이 내 눈으로 떨어진다. 그제야 비를 맞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바로 왼편의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집에 가서 빨리 자야지만 내일도 꽉 막힌 출근길을 피해 일찍 회사에 도착할 수가 있다. 내가 맡은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기 때문에 감기에 걸려서도 안 된다. 빨리 비를 피해야한다. 


갑작스러운 기억이 나를 삼켜버리기 전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딸랑

뛰어가는 동안 내 등 뒤로 자리가 옮겨진 옆 가방의 오른쪽 어깨 끈이 있는 부근에 달려있는 열쇠고리에서 소리가 난다. 또 다시 걸음을 옮긴다. 딸랑


퍼 붇는 빗줄기 소리에 감춰져야 할 소리다. 

지난 6개월 동안 내 가방에 계속 달려있었음에도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난 다시 걸음을 멈춘다.  또 다른 빗방울 내 눈 속으로 들어와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다. 눈을 한 번 비비고 다시 눈을 뜬다. 




나는 어느새 커피숍 이층 창가자리에 앉아있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고, 비를 맞은 내 몸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인해 의자의 방석이 젖어가고 있다. 그때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계단을 쳐다보자 커피를 가지고 내게 다가오는 제이가 보인다. 나와 마찬가지로 비를 흠뻑 맞은 제이는 내게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자신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키고는 한숨을 쉰다. 


이 상황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어나려하는데 몸이 굳었다. 움직이질 않는다. 나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몸부림치지만 내 몸은 움직이질 않는다. 제이는 나를 바라보곤 또 다시 한 숨을 쉰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쓰지만 움직이는 거라곤 내 눈동자뿐이다. 제이는 내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시작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듣고 싶지 않다. 나는 귀를 막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얌전히 제이의 말을 듣는 꼴이다. 제이의 표정은 점점 화가 난 듯싶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몸으로 인해 지친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제이는 내가 우는 것을 보고는 더 불같이 화를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일어서서는 바지 벨트에 걸려있던 열쇠고리를 빼내서 책상에 놓고는 계단으로 걸어간다. 나는 멀어져가는 제이를 보고 가지 말라고 소리쳐보지만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나는 그저 제이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 몸도 움직이질 않고 소리도 나오질 않는다. 눈물만 흐를 뿐이다. 


내뱉어지지 않는 소리가 나에게만 들린다. 메아리처럼 내 속에서 빙빙 맴돈다. 가지 말라고 제이에게 외치고 울며 매달리는 소리가 나에게만 들린다. 눈물이 고이자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눈을 뜨자 버스정류장 앞이다. 눈물인지 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들이 볼을 타고 내려온다. 시계를 보니 10시다. 멀리서 162번이 오는 것이 보인다. 가방을 열어 버스카드를 꺼내려는데. 딸랑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를 쳐다보다가 가방에서 떼어낸다.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열쇠고리를 버스정류장 의자에 올려놓고는 버스에 오른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핸드폰을 꺼낸다. 캘린더를 켜서 10시 20분으로 적었던 집 도착 시간을 11시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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