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리뷰: 헤르만 헤세 [데미안]을 다시 읽고
요즘은 현대 문학이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 행동으로 심리를 추측하는 것에 에너지를 쓸 여력이 없다고 해야 할까. 내면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글이 나에겐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고전을 읽기로 했다. 가장 첫 번째로 선택한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다.
학창시절 읽었던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40이 되어서 읽는 데미안은 달랐다. 그것은 카인, 아벨, 새, 신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춘기에서 가장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 구절은 정체성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에게 닿을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둘러싸인 환경과 처음으로 싸우기 시작하는 사춘기 시절은 괴로운 시기이면서도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다.
십 대가 아닌 현재의 내가 데미안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작품이 심리학 특히 정신분석학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헤세는 외부적인 사건보다 주인공 싱클레어의 내면적인 변화를 줄거리로 삼는다. 싱클레어의 생각, 그리고 행동들이 주요 관심사로 그 외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심리'에 집중한 작품이라 하겠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선과 악의 경계에서 내면적인 혼란을 겪다가 자아 통합을 이른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흑과 백이 확실한 세계에 살았다. 밝은 세상과 어두운 세상의 경계가 뚜렷했지만 어느 순간 두 세계는 현실 속에서 묘하게 공간적으로 혼재해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밝은 세계에 속한다고 확신하고 있던 차에, 한 번의 거짓말로 어두운 세상으로 들어선다. 선하고 밝은 세계가 한순간 낯설어지며, 죄책감으로 인한 괴로움은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전학생 데미안을 만나면서 흑과 백의 중간, 회색의 세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어두워보이지만 알 수 없는 매력적인 세상이다. 데미안의 말 한마디로 죄책감에서 벗어난 싱클레어는 선생님과 교회 목사님이 주장하는 바와 전혀 다른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는 데미안에게 동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함께 보낸 시간을 절대적으로 길지 않다. 그러나 그 영향은 싱클레어의 인생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내면에서 당연시 여겼던 윤리적인 잣대에 의구심을 품게 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찾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 어두운 세계에서 방황하게 된 싱클레어가 점차 데미안과 닮아가는 자신을 깨달으면서 이 소설은 전환점을 맞는다. 그 부분은 자신의 흠모하던 여학생의 얼굴을 그리려다 완성한 그림을 보며 깨닫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빛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오래도록 그림을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그것은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서서히 들었다.
데미안에게 들었던 아브라삭스에 대해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을 통해 알게 된다. 둘은 종교적인 그리고 학문적인 토론을 통해 교류한다. 그 과정에서 싱클레어는 아브라삭스는 결국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였다는 것도 깨닫는다.
내게 도움이 된 것은, 나 자신 안에서 앞을 향해 나아가고 나 자신의 꿈과 생각과 예감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내 안에 품고 있는 힘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된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이제 태어난 환경에 얽매이지도, 친구나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갇히지도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알고, 내면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소설의 결말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데미안과 싱클레어 모두 입대한다. 부상을 입은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조우를 하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상상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데미안은 "자신이 필요할 때는 마음속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싱클레어에게 남기고 사라진다. 소설은 영혼의 인도자 역할을 한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결국 하나가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소설이 끝난 뒤 나는 [데미안]이 극 중에서 실존 인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데미안은 싱클레어 내면의 모든 '의구심'의 대변자일 수 있다.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내면에서 함께 했고, 소설의 결말은 데미안을 내면적으로 흡수하는 것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싱클레어는 흑과 백이 아닌 완전한 회색의 세상에 머물게 되었다. 내면의 빛과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상태 말이다.
우리 모두 내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선들이 있다. 각기 '이것만은 안돼' 또는 '이래야만 해'라는 잣대가 있다. 그 잣대로 남을 평가하기도 때로는 자신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 잣대들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환경적으로 주어진 경우가 많다. 부모님 또는 친구들, 사회 속에서 의심해볼 여지가 없이 내면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잣대가 엄격할수록 진정한 자아와는 괴리가 커지고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만큼 수용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읽고 나는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거구나'라는 관찰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와 남을 평가하는 기준을 버리고 아닌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에 선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남에 대해서도 각기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데미안]은 자신과 남에 대한 그림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걸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요즘 BTS 덕분에 유행이 된 융의 '그림자'이론을 다시 한번 검토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글을 마친다.
모두들 내면에 이르는 좁은 길을 찾기를.
[제목: 데미안과 나]
2019년 04월 27일 토요일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