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 하나를 채우지 못한 이유

- 봄바람, 그놈의 바람

by 선비천사

담장을 넘은 건 꽃가루가 아니라

오래 믿어온 고요의 배반이었다


겨우내 껴입은

외투의 단추들은 단단한 화석(化石)

살랑이는 대기에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서랍 속에서

누군가 수천 개의 바늘을 꺼내어

내 혈관의 지형도를 고쳐 그리기 시작했다


계절의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식탁 위 수프의 수평선이 너무 자주 일렁였고


익숙한 가구들이 삐걱이며 제 자리를 이탈했다

죄의 냄새는 가장 달콤한 산소의 형상으로

폐부 깊숙이 독(毒)을 이식하는 법

이제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다

그놈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함몰된 일상이 웅덩이로 고여 있고

비릿한 꽃향기가 퇴로를 지운 골목에서

나는 스스로 낯선 살결이 되어 흩어졌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가장 잔인한 형벌


등 뒤에서 꽃잎 하나가 툭,

세상의 모든 중력을 끊어내며

나를 허공으로 밀어 넣는다


바람,

기어이 내 생을 가로채 간 그 지독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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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것이다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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