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바람, 그놈의 바람
담장을 넘은 건 꽃가루가 아니라
오래 믿어온 고요의 배반이었다
겨우내 껴입은
외투의 단추들은 단단한 화석(化石)
살랑이는 대기에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서랍 속에서
누군가 수천 개의 바늘을 꺼내어
내 혈관의 지형도를 고쳐 그리기 시작했다
계절의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식탁 위 수프의 수평선이 너무 자주 일렁였고
익숙한 가구들이 삐걱이며 제 자리를 이탈했다
죄의 냄새는 가장 달콤한 산소의 형상으로
폐부 깊숙이 독(毒)을 이식하는 법
이제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다
그놈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함몰된 일상이 웅덩이로 고여 있고
비릿한 꽃향기가 퇴로를 지운 골목에서
나는 스스로 낯선 살결이 되어 흩어졌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가장 잔인한 형벌
등 뒤에서 꽃잎 하나가 툭,
세상의 모든 중력을 끊어내며
나를 허공으로 밀어 넣는다
바람,
기어이 내 생을 가로채 간 그 지독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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