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커피 한 잔의 온도[15화]

15화. 더 이상 싸늘하지 않은 곳

by 선비천사

15화. 더 이상 싸늘하지 않은 곳


2월 말.

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서관 창밖 나무에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선호는 평소처럼 창가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책을 펴고 공부하고 있었다.

380페이지.

해주를 만난 이후로 공부가 잘 됐다. 점심시간이 기다려지니까. 저녁에 같이 나가는 게 기다려지니까.

기다릴 게 있으면 버틸 수 있다.

그걸 알았다.

대각선 자리에서 기척이 났다.

고개를 들었다.

해주가 자리에 앉으며 이쪽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해주가 살짝 손을 흔들었다.

선호도 손을 흔들었다.

둘 다 웃었다.

작은 인사.

말 없는 대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 *


점심시간.

둘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해주가 샌드위치를 사 왔다.

“맛있어요?”

“네, 맛있어요.”

선호가 대답했다.

해주가 웃었다.

“선호 씨는 뭘 줘도 맛있다고 하잖아요.”

“해주 씨가 주는 건 다 맛있어요.”

“뭐예요, 그게.”

해주가 볼을 붉히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선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쁘다.

진짜 예쁘다.

“선호 씨.”

“네?”

“다음 주에 아버지 면회 가는데… 같이 갈래요?”

선호는 놀랐다.

“저요? 같이요?”

“네. 아버지한테 소개해주고 싶어서.”

해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저한테 이런 사람이 생겼다고.”

선호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사람.

그게 나야.

“가요.”

선호가 말했다.

“같이 가요.”

해주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고마워요.”

“저야말로요.”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바람이 불었다.

2월의 차가운 바람이었지만, 봄 냄새가 섞여 있었다.


* * *


저녁.

도서관 문을 나서며 선호는 생각했다.

도서관은 언제나 건조했다.

형광등 불빛은 차갑고, 종이 냄새가 쌓이고,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예전에는 그게 좋았다. 차갑고 건조한 게 편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해주가 있는 도서관은 달랐다.

차갑지 않았다.

건조하지 않았다.

따뜻했다.

그날 이후, 도서관은 더 이상 싸늘하지 않았다.

선호는 해주와 나란히 걸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해주가 물었다.

“뭘 그렇게 웃어요?”

“그냥요.”

선호가 대답했다.

“행복해서요.”

해주의 얼굴이 빨개졌다.

“갑자기 그런 말 하면 어떡해요.”

“사실인데요.”

둘은 웃으며 걸었다.

버스가 왔다.

오늘은 같이 탔다.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는 그 불빛이 멀게만 느껴졌다.

저 불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이고,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옆에 해주가 있었다.

손을 잡고 있었다.

차가운 손이 서로의 온기로 따뜻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는 걸 알면, 버틸 수 있다.

해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았다.

누군가 있으면 버틸 수 있다.

캔커피 한 잔의 온도처럼.



*16화 이어서 보기

캔커피 한 잔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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