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새겨진 붉은 자국으로 쓴 사랑

- 퇴직 후 장바구니를 들며 마주한, 낡은 식탁 위 삶의 철학

by 선비천사

손바닥에 비닐봉지 자국이 남았다.
붉게 패인 그 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사랑일지도 모르겠다고.


평생 교단에 서 있었다.
분필을 쥐고 칠판 가득 세상을 설명하던 손이었다.


역사와 사회를 말하며 거창한 인과관계를 풀어내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비닐봉지 끈을 움켜쥐고 시장을 걷는다.


출석부 대신 장바구니를 들고, 나는 오늘도 물건을 고른다.
이상하게도 이 장바구니가, 그 어떤 책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마트 안은 눈이 시리게 밝고, 시장은 사람 냄새로 가득하다.
나는 물건 하나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무 하나를 살까, 아내가 좋아하는 쪽파를 살까.
만원짜리 한 장을 쥐고 한참을 서 있는 시간.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계산보다도 더 정직해진다.


그리고 결국 하나를 포기하고 돌아선다.
아끼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고르기 위해 포기하는 일.


누군가를 위한 선택이라는 건, 그렇게 조금씩 나를 덜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장을 보고 나오면 손바닥엔 늘 자국이 남는다.

검은 비닐봉지 끈이 살을 파고들어 만든 선명한 가로줄.


그걸 볼 때마다 생각한다.
오늘 저녁은 조금 더 따뜻해지겠구나.


봉지 안에서는 고등어가 반짝이고, 흙 묻은 대파가 고개를 내민다.
그걸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아직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고.


반찬가게 앞에는 늘 긴 줄이 서 있다.
정갈하게 담긴 나물들과 균일한 맛의 반찬들.


사람들은 시간을 사고, 허기를 해결한다.
그 모습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은, 누군가를 위해 망설이는 시간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쓸쓸할 뿐이다.


문득 어머니가 떠오른다.


밥은 먹었냐.


그 말 한마디에 나는 평생을 버텨왔다.
그건 안부가 아니라, 나를 끝까지 붙잡고 있는 말이었다.


어머니의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누가 뭘 좋아하는지, 누가 뭘 싫어하는지.


그건 요리가 아니라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식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흩어진 마음들이 다시 모이는 자리였다.


가끔은 나도 욕심을 낸다.
평소엔 망설이던 좋은 고기나 비싼 과일을 장바구니에 넣을 때.


심장이 조금 뛴다.


그건 사치가 아니라, 내 사람들에게 제일 좋은 걸 주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마음이다.


집에 돌아와 서툰 손으로 재료를 다듬는다.
김이 올라오고, 부엌이 조금 어수선해질 때.


나는 깨닫는다.
내가 지금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해 질 녘, 시장 골목에 그림자가 길어진다.
내 장바구니 안에는 오늘 저녁의 안부가 들어 있다.


맛있다,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나는 오늘도 장을 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머니의 목소리가 노을처럼 따라온다.


밥은 먹었냐.


다시 손바닥을 본다.
붉게 남은 자국 위로, 이상하게도 온기가 돈다.


이제는 안다.
이건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나는 아직도 가끔 헷갈린다.


이 자국이 사랑의 무게인지,
아니면 내가 놓치고 살아온 것들의 흔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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