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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Dec 24. 2021

16. 사랑


사랑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만 맺어지기에 당사자와 기브 앤 테이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도 줄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되고부터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로 만든 정의였음을 깨달았다. 내가 알던 사랑은 아주 부분적인 사랑일 뿐이었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사람과 나와의 관계의 틀로 사랑을 정의하면 그저 배구공처럼 내가 주고 상대가 받고 상대가 주고 내가 받는 일종의 거래가 되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그 거래를 따르기 위해 만들어 낸 하나의 시스템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나는 이만큼 상대에게 했는데 돌아오지 않을 때, 상대에게 서운한 마음, 비난이 일렀고 상대적으로 내가 그에게 가치 없는 사람처럼 여겨져 자존감도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했기에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겨져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겼다.

사랑받지 못했기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은 인간이 그렇게 거래처럼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냉정하게 말해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다.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격이다.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흐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이기에 내가 내 자식을 목숨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의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전달시키시는 도구가 나이다. 나를 통해 주님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신다. 이와 똑같이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 받음을 느낄 때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전달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것,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내게 다른 사람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히 생길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때론 그 긍휼 한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하려고 나 스스로가 노력해보지만 매번 실패한다. 그나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겨우 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정말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 마음이 아파 저절로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긍휼히 넘쳐날 때면, 나는 그 순간을 성령 충만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내 마음의 상태를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기에, 인간은 사랑을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흉내를 낸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주님이 내 마음의 주인일 때, 내가 성령이 충만할 때는 지나가는 이웃을 보고서도 사랑이 넘쳐 함박웃음으로 인사하고 쓰레기를 비우는 사람들이 이 아침이 얼마나 추울까? 안타까워 차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정말로 저절로 생긴다.


사랑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주인 되실 때만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 간의 거래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차이는 아주 크다.

첫 번째는 사람의 노력이고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일상에 흔하다. 내가 누군가와 어울리고 싶어 그 누군가가 좋아할 만한 것을 하고 상대에게 응답을 받는다. 그렇게 주고받고를 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게는 그러한 무언의 거래가 체결되고 우정이 굳건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한 두 번 저버리게 되면 둘의 관계는 서운함, 비난, 복수 같은 것으로 치닫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 친구, 사제간. 인간관계 모두 이것이 사랑인 줄 착각하기에 좌절하고 인생이 고달프며 자살까지 이른다. 더군다나 사랑을 획득하는 것으로 착각하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이 사라졌다고 느낄 때,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또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방적인 사랑만을 할 수 없다.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처음부터 죄성으로 하나님께 멀어진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것,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면 많은 관계가 이해가 될 것이고 관계를 올바르게 적립할 수 있게 된다.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다.

하나님이 왕이고 내가 그의 종이라는 바른 관계를 갖고 그를 주인으로 내 마음에 모시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의 뿌리로 사랑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에게 사랑이 전달된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내가 주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달받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는 노력이 절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 노력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바로 세워졌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봉사를 하기 위해 애쓰거나 노력하지 말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위해 그것들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저 많은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인간에게 스스로가 노력해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종교에 빠져 하나님을 위해 이것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저것을 참았고 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마음에 화가 많다. 사랑 대신 미움이 더 많고, 자신은 옳은 사람, 타인은 잘못된 사람으로 정죄하기 바쁜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교를 위해 모두 건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을 섬기고 자신이 주인이기에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제사 지낸 가인처럼 자신의 생각만으로 열심과 정성을 다하고 형제를 죽이는 자가 될 수 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이기에 죄인 중에도 악질이 될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아는 사람은 자식 교육에서도 우를 범하지 않는다. 내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아이들에게 알려주시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그저 건강하고 무탈하게 웃는 모습만이라도 사랑스럽고 엉뚱한 질문에 놀랄 수 있고 아이들을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며 주님이 아이들에게 주신 재능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을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안타깝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가로막고, 세상 교육을 위해서 주님이 주신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씨앗을 무시한 채, 아이들을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계로 만들어 내고 있다. 거기에서 발생되는 많은 문제를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접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을 도구로 전해지는 것을 안다면 두 사람만의 주고받기로 사랑이 아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같은 사람이 있지만 또 내가 일방적으로 받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상대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게 된다. 너무 신세를 졌다 죄스럽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때와 장소에 다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도 전달받으면 되는 것이다. 틀과 한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습성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고 어딘가에 갇히는 것 없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어리석은 것은 그렇게 기브 앤 테이크를 따지길 좋아한다면서 정작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아왔는지는 까마득하게 잊고 내가 준 것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내가 한 것만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께 들였던 공만 생각한다. 내가 숨 쉬고 평범하게 사는 일상이나 가족, 친구들 등. 그 모든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사소하게 생각하면서.

내가 받은 것에 비해 내가 준 것은 새발의 피도 안될 것인데도 그 새발의 피를 가지고 문제를 만들고 싸우고 미워하며 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기 직전, 하나님께, 왜 아버지 저를 버리셨나이까? 울주 짖으며 짧은 시간 좌절하고 눈을 감으신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가장 어렵고 미천하고 더러운 이웃을 돌보시고 사랑하셨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셨고 사랑했던 제자의 배신과 사랑했던 제자들이 붙잡히실 때, 하나도 남지 않고 도망가는 모습도 보셨다. 인간사에 모든 아픔인 무시, 경멸, 조롱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게 다 일어날 수 없는 전 인류의 고통을 다 겪으면서 공생애를 하셨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성령이 충만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흘러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일상을 살며 성령 충만을 겨우 1분, 예를 들어 24시간 중 그 정도만 느껴도 행복해하지만 예수님은 24시간 성령 충만하셨다. 그래서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공의로운 하나님이 그 죄와 함께 할 수없어 떠나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재를 바로 느꼈고 그 순간, 인류가 자신에게 전가한 모든 죄와 고통의 참옥함을 사랑 없이 보실 수 있게 되셨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 예수님께서는 절망적으로 하나님을 불렀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그것이 사랑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 주님께로부터만 흘러내릴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성령 충만한 것,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 그것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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