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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anf Apr 28. 2023

72. 사람은 사랑할 존재, 하나님은 의지할 존재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만나고 계셨던 곳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본다.

병자와 아픈 사람들과 슬프고 절망적인 사람들, 귀신 들리고 사회에서 외면하고 핍박받는 자들, 창녀와 세리와 문둥병자들 가운데에 계셨다.

문명사회에서 눈에 띄는 병은 약이나 주사, 수술에 의해 많이 호전되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겉으로는 어디에 소속되어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님이 계시던 그 시대와 지금 별반 다를 것 없이 고통 속에, 절망 속에 가난 속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모두 물질문명에서 잘 먹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예전보다 내면의 고통은 더 깊어진 듯하다.


나도 그렇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도 어린 시절에 남겨진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트라우마는 내가 살아가면서 무의식 중으로도 문제를 야기하고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상처가 건드려지면 아프고 두려워 떨고 소리 지르며 울기도 하고 감추려고 노력도 한다. 나는 이 가슴속의 병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

누구나 그렇듯 가장 가까운 몇 사람과 지속적인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남편과 고모인데 아이러니하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라는 공통점도 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는 가장 마음에 들지 않고 짜증이 쉽게 나며 거듭 부딪히고 상처받고 상처받게 될까?

몇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첫 번째는 은여중에 그들과 지낸 역사를 통해 내가 옳고 그들이 틀렸다는 생각이 있다. 나에게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내 의견을 반대하는 그들이었기에 지금 일어나는 조그만 일도 그때의 기억이 밀려와 짜증이 쉽게 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언가 분명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남편에게도 성숙하지 못한 inner child가 있고 그때 상처받은 채로 남겨진 아이를 간직하고 사는 것 같다. 소심했던 어린 시절, 친구가 생기면 이사를 가고 친구가 생기면 또 이사를 갔어야 했기에 항상 어떤 곳에 소속되지 못해 외로웠다. 또 떠나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인지 크게 마음을 주지도 못하고 자기의 의견이나 감정을 그렇게 피력하며 살 필요도 없었다. 과묵하고 일하기 바빴던 아버지였지만 그에게 아버지는 우상이었고 정 많고 사람 좋아하고 여장부 같았지만 사실은 상처도 쉽게 받고 남자에게 의지하고 살았던 엄마는 그녀의 아들, 즉 내 남편에게 솔직함과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분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남편은 외로웠다. 과묵한 아버지 모습도 있지만 파티를 좋아했던 어머니를 닮아 매일 술 마시고 담배피며 자기 혼자 떠들기를 좋아한다.


고모는 어린 시절 많은 트라우마가 있고 가족들에게 이해나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원망이 깊다. 사랑받고 어린 시절의 슬픔들을 해결할 틈도 없이 만나는 남자들마다 고모를 힘들게 하고 폭력적이었다. 고모는 반 평생 그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지 못했고 그녀의 아픈 상처를 이해받거나 보듬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모 힘으로 그 아픔을 눌러 담고 고모 힘으로 극복하려 노력했으며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자신은 강하다고 무장해야 살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오랫동안 마음 한쪽을 절며 걸었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또 아픈 내가 관계를 맺었다. 나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의 술이었고 어린 시절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 마시는 남편이, 강압적인 고모가 불편한 것이다.

나에게 둘은 의도치 않게 내 상처를 자꾸 건드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내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이다.


남편과 고모를 상처받은 자들로 봐주면 어떨까?

내가 그들에게 아픈 나를 수용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말이다.


나는 지금껏 고모에게 내 엄마 자리를 기대하며 아픈 나를 돌봐주길 기대했기에 고모는 내게 무조건 나를 감싸주고 엄마 역할을 해줘야 할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부딪히고 서럽고 속상하고 많이 서운했다.
남편을 내 아빠 자리로 기대하며 무조건 나를 받아주길 바랐고 나를 지지하고 돌봐주길만을 바랬다. 그래서 이상적인 아빠 같지 않은 모습에 실망하고 미운 친아빠 모습이 보이면 짜증이 났다. 슬쩍 자리를 피하고 남들 앞에서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아빠로서 모범적이고 나를 다 이끌어 주는 멋있는 모습만 기대했기에 화가 났었다.


요즘 내 마음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주님이 아빠도 내 엄마도 되어주셨다. 나는 주님 안에서 회복되고 충족되고 있는 자다.

슬프게도 남편과 고모는 주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들을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관계에서 떠나 영적인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든 되어주시는데 더 이상 고모에게 엄마를 기대하거나 남편에게 아빠를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사람은 사랑을 해줘야 할 존재지 내가 기대하고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육적으로 영적으로 아팠던 자였다. 하지만 주를 통해 38년 동안 걷지 못했던 자리에서 영적으로 걷게 된 은혜받은 자다. 하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 바울의 가시와도 같다. 이 고통 때문에 겸손하게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병으로 주시는 영광을 기억하며 살게 하신다. 온전한 은혜임을 안다.

비록 어린 시절 애정결핍 병은 가졌지만 그것은 온전한 주님의 은혜이고 영적으로는 치유함을 받은 자로서 나는 이제 주님이 계셨던 곳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고모를 엄마로 보고 내 상처 회복해 달라고 고모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그만두자. 고모를 상처받은 소녀로 봐주고 고모의 육신에 남은 상처는 치료하지 못해도 영적으로 사랑과 보호를 해줄 수 있는 조카가 되자. 고모가 나에게만큼은 마음을 무장하거나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내가 고모의 안전지대가 되어주자.

남편을 아빠로 기대했던 마음을 그만두고 소속되지 못했던 외로웠던 한 어린 소년으로 봐주고 존재 자체를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해 주어야겠다. 무엇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할 말이 많은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자. 그동안 얼마나 그가 외로웠을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내 아픔을 건드리는 부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알려주자.

고모에게는 강압적이고 고모 생각이 옳다는 것에 내 이야기를 무시하고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억울함과 서러움이 일어난다고.

남편에게는 술 마시고 혼자 떠드는 모습이 아빠의 모습이 생각나 짜증이 쉽게 일어나고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피하게 된다고.

I statement로,

“내 마음/기분이 ~~~~~~~~~~하다. 당신의 ~~~~~~~~~~~~~~~행동/나에 대한 반응은,

나에게 ~~~~~~~~~~~~~~~~~~~~~ 생각하도록/ 영향을 준다.”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길 기대해서는 안된다.

애초에 그것부터 문제가 된 것이다.

고모는 고모였고 남편은 남편이었다.

주님만이 내게 엄마고 아빠셨다.

내게 부족한 모두가 되어주신다.

그리고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해 주신 은혜는 주님 사랑 전하고 아픈 그들 사이에서 주님이 일하시게 해 그들도 나와 같이 영적인 눈을 뜨게 하려 하심이다.


사람은 사랑해야 할 존재. 하나님은 내가 기대하고 의지할 존재라는 이 단순한 문장이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이자 최고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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