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6장부터는 일곱 개의 인을 떼어 마지막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언하고
8장부터는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고 심판의 날에 시작될 것들을 보여준다.
일곱 개의 재앙이 내리는 동안에도 1/3을 남겨두시며 사람들이 이 환난 속에서 마지막까지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
무서운 재앙에서도 놀라운 것은,
요한계시록 9:20-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심판의 마지막 날, 이 무서운 재앙 앞에서도 우상에게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않는 인간들.
그들은 자신이 생각이 맞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옳은 일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어쩐지 오늘날의 대한민국 상황을 보는 것 같다. 2025년 1.19일 서부지검에 들어간 폭동과 미국에서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간 폭동들이 연상된다.
그렇게 나는 예수님을 믿기에 이마에 표가 있어 주님이 나를 구원해 준다 확신했다. 반면, 예수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렇게 완악하고 마지막 날 심판받을 사람이라고 쉽게 결론을 맺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 내리기에는 내 마음에 뭔가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첫째, 정말 구원을 값없이 얻었구나 내가. 하는 생각.
내가 잘나서도 잘해서도 얻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께 구원의 언약을 받았구나.
둘째, 주님은 공정하시고 사랑이시라는데 둘 다 맞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온전히 공정하지 못하고 그 깊은 사랑 때문에 언제나 기다리시고 수많은 기회를 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구나.
공정하게 심판을 받았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도 살아날 사람이 없기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다 담당하게 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원래의 예수님의 자리인 의로운 자리로 자리바꿈을 해주셨다. 창조주 하나님이 딸바보, 아들바보처럼 자식을 깊이 사랑하심을 느꼈다.
셋째, 내가 왜 나를 의인으로 여기고 심판의 날에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가볍게 매도할까? 내가 과연 그들과 진정 다른 존재인가? 에 대한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잘하는 것도 아닌데 값없이 구원을 받았고, 내가 그저 주님께 큰 사랑을 받았기에 예수님의 보혈로 죄 없는 사람처럼 된 것뿐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나는 심판의 날에 우상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 지옥에 떨어질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복음 7장: 37-48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계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 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나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강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람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이 구절을 볼 때에도 요한계시록과 마찬가지로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는 살인자나 나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자로 치부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작은 죄를 지었고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용서 가능한 약한 것이다. 그래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에 마땅하고 내가 짓는 크고 작은 죄는 다 용서받고 구원에 이른다. 나는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이기에 나는 심판의 날에 미련한 사람처럼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지 않는다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나 교만했던 것일까?
작은 죄나 큰 죄나 기준을 누가 나누는가? 나였다.
주님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똑같은 죄인일 뿐인 것을.
우리가 물리적으로 살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살아왔나? 얼마나 말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기까지 했나?
50 데나리온, 500 데나리온의 차이는 소위 사람들이 짓는 범죄의 기준이나 내가 판단하는 기준의 죄가 아니었다.
50, 500 차이는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알고 깊이 회개하냐는 것이었다.
내가 내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이 데나리온의 금액차이처럼 죄로 무겁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을 조금 사랑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심판 날이 왔을 때에도 나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세상의 방법대로 살면서 다 이렇게 사는 거다. 이게 세상에서 사는 방법이다라고 말하며 죄를 짓고 그 죄를 변명하고 두둔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요한 계시록 9장에 심판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나였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이라 치부하기에는 불편한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 둘 중 하나였기 때문에.
요한계시록과 누가복음을 읽고 나서 자신을 50 데나리온을 빚진 자로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나의 죄를 회개하고 내가 누군지를 더 깊게 알아 500 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예배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을 빚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빚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은 내가 나를 분명히 알고 내 죄의 깊이를 바로 인식하는 것. 그래서 내 죄가 많아 주님께 크게 빚진 자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 이것들이 내가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주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살아있는 소망으로 삼고 자꾸 나와 세상의 죄성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자세가 결국 심판의 날까지 살아갈 우리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