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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Jun 20. 2022

회사원이라는 모험 : 회사와 퇴사에 관한 50개의 단어

단어 5 : 동지

대리님은 나보다 반년 늦게 입사했다. 우리가 처음 같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건 서소문 프로젝트에서였지 싶다. 2014-5년이던가. 다른 업무를 했지만 우리는 곧 식사 메이트가 되었다. 열명 쯤 되던 무리에서 이탈한 우리는 둘이 되었다. 평일 점심, 저녁, 가끔 토요일 점심까지 같이 먹었으니, 당시로서는 대리님이 내 식구食口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우리가 (한때) 식구였다고 하면 대리님은 아 그건 좀.. 이라고 선을 그을지도 모른다. 아니, 경천동지 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회사 동료는 회사 동료일 뿐 가족이나 친구가 아님을 명확히 하는 사람이니까(그에 비하면 나는 사회적 거리를 자주 오판하곤 하니까). 식구라는 말이 과하다고 생각한대도 이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생각은 우리를 묶어준 공통점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럴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굳이 다른 표현을 쓰지 않는 건 당시 내가 그녀에게 그정도로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 프로젝트 기억이 상당히 유실되어서 우리가 자주 찾던 세종문화회관 뒷쪽 샐러드 집, 매일 점심 저녁으로 산책하던 서소문길이 이미지 몇 장으로 남아있는 데 비하면 힘들었던 기분은 또렷하다. 강렬하다. 그때 그녀가 내 옆에 있었다.


우리가 다시 점심 메이트가 된 건 그로부터 2-3년 후. 유지보수 업무로 고객사에 처음으로 말뚝을 박은 해였다. 이번에도 서로 다른 업무 파트에서 일했지만 어쩐지 곧 단둘이 식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 시절에는 돌솥밥집과 브리오슈 도레(얼마 전 문을 닫았는데, 오픈 초기 핫 샌드위치와 샐러드가 좋아서 곧잘 다녔다), 영상자료원 지하 카페의 차가운 밀크티를 루틴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던 것 같다. 불안증이 심해지고 우울증이 마각을 드러내시 시작하던 시기로, 회사생활의 가장 절망적인 시간을 지나던 때였다. 그때도 그녀가 내 곁에 있었다.


입맛은 우리의 주요 공통점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집밖에서 밥 먹을 데 찾는 게 고생스럽다. 달고 짜고 매운 걸 잘 못 먹고 조미료 맛을 견디기 어려워해서다. 우리가 샐러드와 돌솥밥만 몇 개월이고 먹을 수 있었던 건 이런 입맛이 제법 맞았기 때문이리라 추측한다(그러고보니 물어본 적이 있나 싶다).


우리는 조미료만큼이나 조직생활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회식이 있는 날엔 아침부터 병이 났다. 어떤 날은 너무 출근하기 싫어서 출근길에 택시비를 기꺼이 내는 사람들이었다. 주변의 동료들에게 곧잘 오해 받은 조직원이었으나 그렇다고 우리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거나 고칠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대리님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말한 적은 없는  같지만, 대리님, 우린  아웃사이더였지요?


우리 유대감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업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 통감했고 그 고통을 일상적으로 나누었다. 내게 그런 상대로는 (가족 외에) 대리님이 유일했다. 차마 말 못할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회사 사람, 그 고통을 공감하는 사람, 그녀가 나의 대리님이었던 것이다.


대리님은 밥 먹는 동안 내 수다를 잘 들어주었다. 돌이켜보니 이게 참 고맙다. 대리님과 함께 하는 점심시간에야 비로소 나는 영화, 책, 김어준의 뉴스공장, 빨간책방과 필름클럽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듣고 말하고 대화하고 싶은 주제들을 내 머리에서 꺼내 입밖으로 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늘 외로웠다.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는 집단에 속하면 혼자가 아니면서도 혼자가 됐다. 그때의 감정은 쓸쓸함이었다. 말하고 나면 숨통이 좀 트였다. 내 외로움과 쓸쓸함을 대리님은 그렇게 달래주었다. 업무 외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어주는 회사 동료가 정말이지 큰 위안이 되었다. 진심으로 늘 고마웠다.


대리님은 유머와 재치가 장점인 사람인데 이 회사에서는 그 점을 그다지 강점으로 인식하는 것 같지 않다. 하기사. 유머와 재치는 IT회사에서 프로그래밍 직무에 요구하는 역량 우선순위로 오백번 째 쯤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유머와 재치가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획 같은 대리님 최고 강점은 우리 직무 요구역량과 거리가 멀다. 자기 장점을 발휘할 수 없는 포지션에서 일하는 건 힘들기도 하고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좀 더 중립적으로 표현하자면, 힘이 빠지는 일이다. 그게 회사가 대리님에 드리운 옅은 그림자였으리라. 그래도 점차 관리직으로 포지션을 옮겨가면 회사에서 그녀의 장점을 드러낼 기회가 자연스럽게 많아질 것이다. 그녀만은 지금처럼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다 관장 handle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나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녀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그녀는 엄마니까, 나와 달리.


최근 그녀가 들려준 내 장점은 회사를 떠날 결정적인 용기를 주었다. 그 말에 상당히 설득되어서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확고해졌다. “통찰력이 있고 말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으며 용기도 있고 도전정신도 있다”는데, 이만하면 어디서든 굶어죽진 않을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였다. 다만, 그럼에도 조직에서는 나를 소극적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안타까워해주었는데, 그녀는 볼 수 있지만 다른 조직원들이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점심을 같이 하지 않아서 인건가? 이 내적 질문은 짐짓 모르는 체 능청을 떨며 어물쩡 넘겨버릴 작정이다. 여하간에 그녀의 평가는 내게는 다른 누구의 평가보다 중요하다. 그녀는 나의 소중한 단 한명의 동지였으니까. 그런 대리님이 본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후회는 없다. 내가 높게 평가하는 가치들을 대리님이 나에게서 발견했다는 게 기쁘다. 대리님이 말해준 내 장점을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는 곳, 그런 나를 기다리는 곳, 내가 진짜 속해야 할 곳으로 이제는 가야겠다.달이 차오른다. 이걸 놓치면 영영 못 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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