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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6주. 쇼생크 탈출(1994)

2020. 05. 25. by 감자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야?”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이 영화를 꼽을 때가 있었다. 재미없는 영화 평론가들이 모여서 걸작 영화를 꼽는 교양 프로에서 쉰들러 리스트 등과 함께 늘 등장하는 영화라 좀 멋이 없다고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좋은 영화야. TV에서 틀어주면 반드시 끝까지 보게 되거든.” 


그렇게 대답을 하고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영화를 항상 TV로만 봤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시작부터 본 적이 없다는 것도 뒤이어 떠올랐다. 나는 늘 TV 채널을 돌리다가 이 영화가 나오고 있으면 리모컨을 멈추고 채널을 고정했다. 그리고 쿠션을 끌어안고 앤디의 강인함에 푹 빠져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집에 TV도 없고 몇 번이고 본 영화를 멍하니 앉아서 보고 있을 시간도 없으니 이 영화를 볼 일이 없지만 지금 봐도 이 영화는 재미있을 것 같다. 내가 이 영화를 가장 열심히 보았던 때는 약 10년쯤 전이었다. 20대 중반에서 29살까지 약 5년에 가까운 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 내려와서 끝도 없는 무기력을 느끼며 그저 집에 틀어박혀 있던 나날에 말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잠수를 타고 있는 나를 참다못한 당신이 화를 내었던 바로 그 시절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제는 시간이 꽤 흘러서 그렇겠지만, 그렇게까지 어둡게 기억되지는 않는다. 취포자로 멍하니 집에 있으면서 나는 그냥 살았다. 아침에 아홉 시쯤 일어나 지금보다 10살이 젊은 엄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그건 지금도 똑같지만) 2층 발코니에 올라가 빨래를 걷거나 널었으며 엄마와 함께 목적 없이 부산의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다녔고 무기력 때문에 솟아나는 짜증을 엄마에게 다 풀었다. 그 5년의 시간 동안 나는 장편 소설을 4편 썼고(망가진 옛 컴퓨터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했고 플래시 게임에 중독되다 못해 스스로 게임을 만들었고 빅뱅에 엄청나게 몰두했다. 그리고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상당히 창피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손발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에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깜박이며 자살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지면서 잠이 왔다. 잠을 자고 나면 내일이 와 있었다.


왜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야 했을까? 뒤돌아보면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때 일을 하고 돈을 벌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을 필요는 없었을 것인데. 그때 나는 뭐랄까, 내 머리로 생각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은데 그러면 도무지 시간이 가지 않으니 그저 뇌에 의미 없는 자극을 줘서 현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행동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우울증 초기 증세 같다고 스스로를 진단만 하고 있었다.


‘쇼생크 탈출’은 그럴 때에도 재미있었다. 아니, 그 영화를 가장 열심히, 많이 보았던 때가 그 시절이었다. 며칠 동안 머리도 감지 않고 TV 앞에 앉아 있다가 OCN 같은 데에서 이 영화가 나오면 계속 보고, 또 봤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쇼생크 감옥에 들어온 앤디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젊음을 다 보내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앤디를 절망케도 하지만 그래도 온건한 눈빛으로 자신이 나아갈 곳을 바라본다. 구역질 나는 하수관을 기어가 쇼생크를 탈출한 뒤 비를 맞으며 샤워를 하는 앤디의 모습은 자유 그 자체이다. 이후 멀끔하게 옷을 입고 은행에 찾아가 교도관장이 착복했던 돈을 다 찾아 나갈 때의 여유로운, 하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초조한 눈빛은 그가 그저 강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가진 희망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모든 사회생활을 끊고 집에만 있었던 그 5년간의 시간이 내게 감옥과 같은 때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마음만 내키면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가족이나 가까운 그 누구도 내게 비난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회 분위기 역시 백수로 지내는 청년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대신 기운을 내라고 도닥여주던 시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나는 내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근거가 있는 절망은 절망이 아닐 것이다. 나는 감옥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밀려 온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또 봤다. 그리고 앤디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를 머릿속에서 계속 굴리고 또 굴렸다. 희망이라는 글자에 맨들맨들 윤이 날 때까지. 그러고 나면 기운이 좀 났다. 이것이 파토스의 힘일 것이다. 앤디는 몇 년이고 편지를 써서 교도소에 도서관을 만들었고 글자를 모르던 젊은이를 가르쳤으며 자기를 린치 하려던 작자들에게 이를 세웠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탈출로를 만들었다. 결국 자기가 만든 길로 자신을 구원했다. 나도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는 나 역시 마음이 뜨거웠다. 지질학처럼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가해지는 힘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이 일었다. 희망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제를 스스로에게 계속 들려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시 힘없이 발을 끌며 이불속으로 들어갔지만 몇 번이고 마음속에 되새겼던 그 말은 분명 내게 힘을 주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앤디 옆에 레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앤디는 도통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레드는 앤디로 인해 변화하고 감화된다. 그리고 앤디가 탈출한 뒤에 ‘새장에서 새가 탈출한 뒤 방 안은 조금 더 어두워진다.’라며 그를 깊이 그리워한다. 그리고 가석방을 받은 뒤 두려움에 떨며 살다가, 자살을 결심하던 순간 앤디를 떠올리고 진짜 자유를 찾아 행동한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박혀있던 안주하려는 습성을 떨쳐버린 것이다. 레드가 평범한 사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나 역시 앤디를 보며 레드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곤 했다.


다행히(?) 나의 방황은 5년 만에 끝이 났다. 서른 살이 되면서 정신을 차렸다고 해 두자. 별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외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물론 여전히 불쑥불쑥 다 때려치우고 다시 잠적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앤디가 틀어주던 모차르트의 ‘편지 이중창’을 머릿속에서 재생해 본다. 그리고 교도관을 화장실에 가두고 불안해하다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천천히 웃어 보이는 앤디를 상상하고, 나 역시 그 표정을 지어 본다. 그러면 불안한 마음 어딘가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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