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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7주. 여름의 조각들(2008)

2020. 05. 30. by 만정

여름. 내게는 단연코 최고의 계절이다.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져, 같은 하루도 다른 계절에 비해 긴 것만 같은 은혜로운 기간이다. 여름에만 입을 수 있는 가벼운 티셔츠와 스타킹을 벗을 수 있는 자유도 사랑한다. 여름이 들어간 것, 여름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단 호감을 갖고 대하게 된다. 이 프랑스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름보다는 어쩌면, 여름이 지나간 후 남은 조각들을 비추는 영화라는 점에서, 뜨거운 온도보다는 알싸한 맛을 주는 영화라고나 할까. 그런 점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프랑스’ 영화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통일된 주제를 향해 영상과 이야기를 모으기보다는, 하나의 영상과 이야기를 통해서 다양한 주제와 감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런 것 말이다.


‘여름의 조각들’은 흩어져 지내는 삼 남매와 그 가족들이 어머니의 75세 생일을 맞아 모인 여름날의 어머니 집에서 시작된다. 그 집은 19세기 미술품과 귀중한 아르누보 가구들이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미국과 있는 둘째와 중국에 사는 셋째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예상한 어머니는, 큰 아들 프레데릭에게 자신의 죽음 이후 집안의 방대한 예술품들과 집을 처분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지만, 프레데릭은 아직 먼 얘기라며 도통 들을 생각을 않는다. 어머니가 예고한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고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삼 남매 모두 슬픔에 빠진 가운데, 당연히 집과 집안의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할 거라 생각한 프레데릭은, 자신과 달리 어머니 집에 애착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집과 예술품을 돈으로 환산했으면 하는 동생들의 의견을 듣고 당황한다.


이 유산 처분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가족 이야기'로 쓸 생각이었다. 부모님은 고향 원주 집에 계시고, 난 원주에서 자란 시간과 서울에 산 기간이 어느덧 비슷해질 시기에 이르렀다. 동생 역시 대학시절부터는 원주를 떠나 지내왔다. 운이 좋게도 얼마 전부터 나는 동생과 걸어서 20분 거리에 살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동생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모든 가족이 그렇겠지만, 우리 역시 우리 가족만이 공유하는 서로의 익숙한 또는 지긋지긋한 성격이 있으며,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쉽고 정확하게 서로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그 공통점 위에서 낯선 시간과 경험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당황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늘 나를 돌봐주고 내 투정을 받아주던 엄마가 내 도움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되어 있었을 때에도 그렇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빠의 어떤 모습이 그랬고(그러나 사실 이건 너무나 이해 가능했다. 아빠는 그 정도로 나와 비슷한 사람이므로), 올케가 전하는 동생의 이야기들이 그랬다.


그리고는 서로가 쌓아온 다른 경험과 시간을 건너 서로의 삶에 관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독립적인 성인이라는 강한 자의식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서로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어렵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그 깨달음은 떫은맛이 나는 씁쓸한 감정을 동반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족임에도 그렇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걱정하고 사랑하지만 그에 기반한 조언과 잔소리는 제 3자만큼도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아니 어쩌면 서로를 오해하게 하고 서운하게 해서 사랑을 갉아먹는지도 모른다. 사랑한다고 해서 항상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의견이 같은 것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 서운해진다. 어머니의 유산을 둘러싼 삼 남매의 갈등에 직면한 큰아들 프레데릭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 동생들의 유산 분배 요구와 어마어마한 상속세 문제 때문에, 결국 어머니의 집은 팔고 집에서 쓰던 예술품들은 오르세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집에서 꽃병으로 쓰던 물건은 유명 작가가 남긴 희귀한 인상파 작품으로 밝혀지고, 집 한 구석에 청소용품을 보관하던 장식장은 19세기 아르누보 가구로서 어머니가 사용하던 책상, 의자와 함께 미술관에서 적극적으로 소장하고자 하는 예술품으로 신분을 바꾼다. 프레데릭이 아내와 함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이 물건들을 ‘관람’하는 시퀀스는 정말이지 명장면이다. 진열된 물품들이 마치 생명력을 잃고 박물관에 갇혀버린 것 같다고 프레데릭은 말한다. 저것들은 "사용되어야" 생명력을 얻는 것들이라고. 반면,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를 위한 역사"이며, 이제 우리 가족뿐 아니라 공공 모두가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로마의 보르게제 미술관은 원래 보르게제 추기경의 저택이었으며, 그의 수집품들이 전시된 공간이다. 넓은 공간이지만, 엄청난 숫자의 그림과 조각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 자신의 중요도에 해당하는 만큼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미술관을 설명할 때 항상 등장하는 카라바조의 그림 몇 점이나 베르니니의 조각들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그래서 2층인지 3층 어느 방을 가면 우리 집 10배쯤 되는 공간의 벽과 천장 가득히 그림인데, 하나하나 보는 게 불가능해진다. 그러다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여기 살던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그들은 매일 그 그림들을 봤을 것이며, 그림 하나하나를 볼 시간이 충분해서 이렇게 소화불량 상태의 느낌이라곤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 봐도 영혼이 맑게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데, 이런 것에 둘러싸여 매일 흠뻑 젖어 살았을 인간들이 부러운 한편, 사연이야 어쨌건 간에(집안이 망해 나중에 국가에 넘겨졌다), 이 모든 것이 잠시나마 내게 허락되었다는 것에 감사했던 것 같다. 이것은 피렌체의 우피치나 비엔나의 알베르티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글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영화는 오르세 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실제로 박물관에 모셔져 있어야 할 귀중한 작품들이 영화에 대거 출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생활 속에 배치된 모습을 영화 속에서나마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도 다시없을 멋진 외출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예술. 항상 곁에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그 기쁨과 아름다움이 곁에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살만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나의 사랑하는 미술관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때로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사랑하는 가족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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