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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9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8)

2020. 06. 21. by 만정

괴팍하다. 성격에 대한 이 형용사는 국어사전에 아래와 같이 정의되어 있다.     


까다롭고 별나다.


용례로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 보인다.     


1. 나머지 사내들은 산전수전 다 겪어 성질들이 괴팍하고 드세고 아금받고….

2. 그는 성품이 괴팍하고 행실이 불미하여 따르는 이가 적었다.

3. 그 사람은 성격이 괴팍해 사람들과 잘 화합하지 못한다.     


괴팍한 성격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 중에는 미켈란젤로 있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로 유명하지만 자신을  번도 (미천한) 회화쟁이로 인정한  없다는 (품격 높으신) 조각가, 아름다운 다비드의 창조주 말이다. 상대의 작품이 형편없다고 대놓고 비웃다가 얻어맞는 바람에 코가 내려앉았다는 일화는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수도 없이 회자된다. 산전수전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따르는 이가 적고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했을 법하다.


괴팍한 ‘인간으로 내가  번째 떠올리는 자가 바로  사람, 영화 ‘이보다  좋을  없다 주인공 멜빈이다. 멜빈은 쓰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로맨틱 소설의 귀재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가 소위 말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의 괴팍함에 대한 영화의 조작적 정의는 이렇다. 첫째, 강도 높은 강박증 환자로서, 그는 혼자이다. 둘째, 강도 높은 강박증 환자로서, 거리의 보도블럭 선을 밟지 않기 위해 애쓴다(뒤뚱거리며 걷는다). 셋째, 역시 강도 높은 강박증 환자로서,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자신이 준비한 플라스틱 식기를 이용해야만 식사를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자기 자리 앉은 타인을 쫓아내기도 한다. 넷째, 강도 높은 강박증의 일환으로 보이는 결벽증 때문에 옆집 강아지를 끔찍하게 싫어하며,  싫어함 때문에 강아지를 쓰레기통에 넣을(유기할) 수도 있다. 등등.


그런 멜빈이 처하는 영화적인 상황은 옆집 주인이 강도상해를 입는 바람에, 졸지에 자신이 유기하려고 했던 강아지와 동거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식사 시중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웨이트리스 캐롤이 그 자리에 없다는 것! 영화가 만든 이 얄궂은 덫에 걸린 멜빈. 과연 그의 운명은?!


이 영화는 괴팍함에 대한 내 연구 교보재의 하나였다. 괴팍함이라는 특질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다. 괴팍한 인간으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간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괴팍한 아빠와 괴팍한 작은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 괴팍했다는 증조할아버지(한번 뵌 적 없는 제가 한 말은 당연히 아니니, 노여워 마세요.)의 딸, 손녀, 증손녀로서 괴팍한 가문의 당당한 일원이다(계보나 병은 나이가 들수록 자주 내 단점의 원인이나 기원으로서 나를 안심시켜주는 좋은 핑계가 되고 있는데, 나는 아마 좀 비겁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 괴팍함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때론 질적 차이이지만), 내가 보기엔 멜빈의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남들에 비해 좀 뚜렷한 ‘선’을 갖고, 그것을 지키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 자신을 토대로 분석해보자면, ‘우리’는 좀 불안하고, 그래서 확실성을 희구한다. 불확실성의 총체인 타자와의 관계는 제한적으로만 허용 가능하며, 불안함과 불확실성을 저울질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때로 유별나고 변덕스러워 보일 것이다. 이해한다.


여하간, 나는 엄마나 할머니가 자주 흉보는 그 괴팍함이 내 안에 유전자로 각인되어있다는 것을 아주 어린 나이에 눈치챘고, 이제 이렇게 괴팍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가 말 못 할 고민이었다. 왜냐, 할머니나 엄마처럼 다들 내 흉을 볼 것이 명약관화하니 말이다. 흉 보이는 문제는 둘째 치고, 나는 과연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나를 이해해줄 인간이 지구 상에 과연 존재할 것인가? 유전자가 만든 이 얄궂은 덫에 걸린 만정. 과연 그의 운명은?!


멜빈은 우여곡절 끝에 캐롤의 사랑을 쟁취한다. 그리곤 사랑의 힘으로 마법에서 풀려나는 공주님과 비슷하다. 그는 마침내 자연스럽게 선을 넘는다. 나? 나 역시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그 사랑과 나라는 이야기의 결말과 상관없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남을 것이다. 나는 가족을 제외한 타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그리고 이해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간에 그 이해는 거의 완벽했고, 어떤 의미에서 나를 더 나은 나로서 약간 창조해내기까지 했다. 멜빈과 나라는, 희한한 마법에 걸린 공주님은 마침내 왕자님의 키스를 받았고, 자기의 한계를 얼마간 뛰어넘었다는 의미에서 영화와 삶은 (유보적인) 해피엔딩이 된다.


미스터리는 멜빈과 내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한 사람에게 있다. 수차례  영화를 봤지만, 도대체  캐롤이 멜빈을 받아들이는지  석연치 않았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역시 미스터리이며, 어떤 면에서는 나에 대한 당신의 이해와 애정, 사랑 역시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이건 어쩌면 내가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사랑받을만한 존재라는 자기 확신이 없음을 시사하는 문장인가보다. 다만, 오늘 다시 보니, 영화에서는 멜빈이 캐롤의 장점과 가치관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온전히 사랑하는 지구 상의   인류라고 역설하는  캐롤의 마음이 녹아버리는 연기가 연출되어 있다. . 그럴 법하다. 우리 엄마의 경우에는, 아빠의 괴팍한 면을 빼고는 아빠랑 공유하는 세계가 있었다. 요리나 그릇에는  관심이 없지만 맹그로브 나무 이름을 외우고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을 경험하길 즐기며 또한 정확히 들을  아는, 교양 있고  실용적인 여성은, 이태백의 한시와 자기가 좋아하는 시들을 외울  아니라 (그런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술친구들 사이에서  시를 읊길 좋아하는 고답적이고  실용적인 남성의 바로 그런 점을 조금은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어쩐지 통하는 데가 없진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내 경우에는? 그들은 왜? 라고 묻다가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세계가 아름답고 살만한 건, 어딘가 이렇게 이상하고 유별나며 유일한 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특별한 사람이 있기 때문인 거라고. 세계에는 아무런 미스터리가 없으며,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된 점도 없을 거라고(혹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는, 적어도 나 정도는 이상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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