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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48주. 당갈(2018)

2020. 06. 08. by 감자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내가 엄청나게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나는 교실의 규정을 만든다. 아이들이 자신의 신체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지정할 수 있다. 아이들의 어떠한 생각은 나에게 허용되지만 또 어떠한 생각은 비판받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판결 내리는 사람이다. 물론 아이들이 내 말을 다 잘 듣는 것은 아니다. 어떤 아이들은 나의 말을 수용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내게 반항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교실의 책임자이자 입법자, 판결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권위라는 게 없는 교사다. 일단 나는 애들을 혼을 못 낸다. 눈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낮고 크게 내는 순간, 내 자신이 머쓱해서 견딜 수가 없다. 기껏해야 잔소리를 하지만, 잔소리에는 힘이 없다는 것을 우리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애들은 나를 거의 무서워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놀림거리로 삼는 아이들도 많다…. 물론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겁을 주지 않고도 자기의 지시를 잘 따르게 하는 교사들도 많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경외감이나 인기를 얻어 아이들이 기꺼이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르게 한다. 나는 정말로 그들이 부럽고 대단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로 하여금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집중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교사가 되고 싶지만, 실제 내 수업은 그렇지 못하다. 내 수업은 꽤나 산만하고 정신없이 돌아간다. 애들이 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수업에도 모범적으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많다. 하지만 그건 내 힘이라기보다는 그 아이가 원래 그런 아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내 말을 듣고 안 듣고가 각 아이의 성격이나 성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건 내게 교사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없다는 셈인데, 교사란 아이들을 교사가 목적한 곳에 닿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위가 없다는 것이 권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아이들을 판단하고 점수를 매길 수 있다. 아이들이 내 말이 듣지 않는 것을 수업의 정상화를 방해하는 아이들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니다. 애들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는 나를 자각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선뜩해지기도 한다. 과연 나는 어른에게도 같은 반응을 보일까?


선생님, 교사, 스승, 강사….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지만 그 안에는 공통적으로 존중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누군가의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또한 그 책임에는 누군가의 미래를 주조할 수 있다는 권력이 함께 쥐어진다. 나는 아직도 이 권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도통 모르겠다.


춤 추지 않는 발리우드 무비 ‘당갈’에는 자신의 목적에 미친 스승 마하비르 싱 포갓이 등장한다. 마하비르는 자신이 못 이룬 인도 레슬링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두 딸에게 이루게 한다. 두 딸인 기타와 바비타는 아버지의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받고 결국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업적을 달성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처음과 끝이다. 인도 영화 중 해외에서 역대 최고 흥행을 이룬 작품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복잡하지 않은 스토리와 호쾌한 스포츠물이라는 장르성이 합쳐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무대뽀 코치 마하비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영화 속에서 마하비르는 기타와 바비타의 아버지라기보다는 두 레슬링 유망주들의 미친 코치로 등장한다. 실제로 마하비르는 레슬링 금메달을 따게 하려고 자식을 낳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몸싸움에 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혹독한 훈련을 강제한다. 아이들은 아빠이자 무서운 코치인 마하비르의 말을 덜덜 떨며 엉엉 울며 들을 수밖에 없다. 딸들이 ‘여자애다운’ 생활을 즐기며 훈련을 게을리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마하비르는 아이들의 긴 머리를 남자애들처럼 싹뚝 잘라버리고 만다. 그 이후 아이들은 또래집단 내에서 배척을 당한다.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피로를 꾹꾹 눌러서 승부욕과 몸을 만든 아이들은 다행히 승승장구한다. 마하비르는 자신의 작품이 원하는 성과를 내었을 때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내가 마음에 계속 걸리는 지점들은 마하비르가 자신의 꿈을 위해 아이들을 계속해서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는 데에 있었다. ‘조국의 영광을 위해’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일견 이타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더 겁난다. 아이들이 고통에 차 흘리는 눈물은 그의 대의 앞에서 나약한 소리에 불과해진다. 그것은 학대가 아닐까? 한 사람의 미래를 누군가가 정해놓고 그를 위해 움직이도록 강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것을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행해도 되는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마하비르의 강력한 지도가 있었기에 기타와 바비타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끈기, 기술과 집중력을 얻었다. 훈련으로 획득한 강점들을 가지고 세계 최고가 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정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설령 목적지를 정해 놓는다 해도 그리로 향하는 과정은 힘들고 방법 역시 알기 힘들다. 그때 자신을 이끌어 주는 스승이 있다면, 올바른 길을 곁에서 알려주며 미래에 대한 책임을 나누고 나태해진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권위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운이겠는가?


학생을 바른 길로 이끄는 이상적인 스승과 학생을 학대하는 폭력적인 독재자는 구분하기 힘들다. 글쓰기 수업을 하다 보면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맥락도 없이 ‘감자는 맛있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무의미하고 무성의한 문장을 써 놓고 킥킥거리며 나를 놀리는 녀석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그 문장을 빡빡 지운다. 그날 그 애의 글은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교사로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직도 적절한 방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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