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정 Mar 27. 2021

50주. 커브(2017)

2020. 06. 21. by 감자

이번 영화‘curve’는 단편영화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부산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상영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그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것은 아니고, 최근 갑자기 트위터에서 이 영화가 리트윗이 되며 인기를 얻어서 보게 된 것이다. 요즘 웬만한 영화는 두 시간을 넘어가는 시대에 1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영화라 기껍게 보았다. 하지만 보고 난 뒤 기분은 전혀 기껍지 않았다.


좋은 단편영화의 특성이 그렇듯 이 영화도 스토리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영화가 시작하면 관객들은 정신을 잃은 한 여자가 홀로 댐 같은 기묘하고 거대한 콘크리트 벽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직에 가까운 콘크리트 벽은 곡선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그 위에 얹힌 여자는 언제든 미끄러져 떨어질 듯하다. 의식이 돌아온 여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고 패닉에 처한다. 매끄러운 곡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여자는 오직 손바닥의 마찰력만으로 몸을 위로 끌어올리려 하지만 도무지 잘 되지 않는다. 7분 정도 여자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나는 이 영화를 자그마한 핸드폰 화면으로 보았다. 만약 영화관 스크린으로 보았다면 그 절망감은 극대화되어 전달되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어떠한 다른 해석을 할 여지없이 죽음의 바로 앞에 놓여 있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더 길었다면 주인공의 절망만 더 길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인생의 메타포라고 느낄 영화이다.


요즘 나는 ‘이렇게 살면 절망뿐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일을 많이 해서 고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래가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세상에 가 볼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고 그 마음 역시 쉽게 먹어지지 않는다. 물질 자산이 증식하는 것도 아니고 육체는 점점 쇠약해진다.


나는 어떻게 늙어갈까를 상상할 때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노년이라고 볼 수 있을 어떤 시기, 나는 모아 둔 자산이 얼마 없어서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육체를 짊어지고 매일 어떠한 일을 하러 가게 될 것이다. 열심히 살았으며 운도 좋다면 나를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소소한 강의 같은 일자리를 얻을 것이다. 집안일을 하는 건 체력에 부치는 일이고 혼자 살아가면서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귀찮고 힘든 작업이 될 것이다. 집은 지저분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늘 어딘가가 불편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언제나 깨끗한 일상을 지속해 나가는 밀라 논나는 정말 대단한 분이 아닐 수가 없다. 아무튼 이건 그나마 ‘근사한’ 버전이고, 심하면 집도 절도 없는 행려병자가 될지도 모른다. 어떤 버전이더라도 나는 혼자 있을 것이고 자금적으로 여유가 없어 보인다.


상상은 힘이 있다고 한다. 좋은 상상은 그러한 현실을 불러온다고 하는 믿음도 있다. 심지어 ‘시크릿’이란 책에서는 자기가 강하게 믿기만 하면 우주가 온 힘을 다해 그 믿음을 들어준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예전에는 그게 다 개소리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어떤 뜻인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미래에 대한, 더 크게는 내 인생에 대한 상상을 해 보자고 하면 절망적인 상황을 상상하거나 이 영화 같은 끔찍한 메타포나 떠올리게 되니 이것 참 큰일이다 싶다.


하지만 미래를 현재의 내가 차곡차곡 쌓여서 이루어지는 어떤 주름살 같은 것이라고 보았을 때,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내 현재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운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던 거다. 내가 갖고 있는 노년의 이미지 역시 사실 굉장히 빈약하고 백일몽 같은 느낌에 불과하지 구체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다. 누가 계획을 세워서 행려병자가 되겠냐만은…. 성공하는 사람들은 한 달 뒤, 1년 뒤, 3년 뒤, 5년 뒤 뭐 이런 식으로 인생의 계획을 세운다고 하고 그게 필요한 거 같다고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긴 한데, 오늘 하려는 주제와는 벗어나는 얘기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미래에 대해서 어두운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떤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매끄러운 곡선 구조물 위에 기묘한 자세로 얹혀서 절망에 빠져 끙끙거리며 버둥거리다가 추락해 목숨을 잃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기쁨이 있다니…. 글로 쓰고 나니 좀 ‘이 사람 뭐지’ 싶은 기분인데, 당신도 그렇겠지만 조금만 더 읽어 달라.


끔찍한 미래에 대해 상상하면 물론, 내가 변태가 아니기 때문에, 즉각적인 기쁨이 솟아나지는 않는다. 그런 상상이 들면 나는 당연히 의기소침해진다. 그런 인생은 살고 싶지 않은데 하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그 외에 다른 인생은 잘 없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느낌을 받는 나 스스로가 좀 한심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일을 열심히 해야 되겠다 친구들에게 잘해야 되겠다 동생을 귀하게 여겨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이 진행된다. 그리고 좀 상투적으로 ‘인생….’하며 대충 먼 곳을 살짝 바라보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것이 내가 나의 인생을 떠올리는 루틴이다. 이상하게도 이 루틴을 거치고 나면 기분이 좀 좋아진다.


자신의 망한 미래를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진다니,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겁이 많고 박한 인간이라서 내 미래에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쳐 줄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원체 게으르면서도 그릇이 작은 인간이 되어 놔서 열심히 살아야 이룰 수 있는 미래는 언감생심 떠올리지도 않는 것일까? 내 미래라도 헐뜯어야지 비교적 현재의 내가 좀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쪼잔한 인간인 것일까? 가볍게 우울할 때 그 기분이 바닥을 치면 다시 위로 올라온다는 그런 반작용 때문일까? 다 아니라면,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상황이 정말 처절하고 끔찍하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안심을 하게 되는 걸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커브’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뭐, 어마어마한 대박을 치지는 못하겠다는 건 알 수 있겠으나…. 그런데 나는 또 안다. 이런 정처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으니 사실 나는 복 받은 인생이라는 걸.

이전 24화 49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