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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51주.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

2020. 06. 28. by 감자

나는 한 번도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 한정으로, 홍상수 영화를 보았는가 보지 않았는가는 영화라는 매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최저 기준선이 될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은 독특한 스타일을 가졌지만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다. 유명한 감독이지만 흥행이 잘 되는 감독은 아니라 ‘틀면 나오지’ 않는다. 영화관에 자주 영화가 걸리므로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접근성이 낮지 않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볼 일이 없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 영화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메이저 작품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들어 보기만 하고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작품이 되는 거다. 일테면 톨스토이의 ‘부활’ 같은 것이다. 나는 ‘부활’도 읽지 않았고 홍상수 감독 영화도 본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프로젝트가 구상된 데에는 김연수 작가의 역할이 컸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예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편을 준비하면서 볼 영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내심 낙점해 두었던 것이다. 최근 김연수 작가의 신간도 나온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괜찮은 수미상관이 될 것 같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홍상수 감독 작품을 보게 된다는 것도 이 프로젝트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이 영화가 2009년에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시간 참 많이 흘렀다는 감상이 먼저 들었다. 영화를 틀자마자 나오는 어벙한 표정과 구부정한 자세의 김태우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제천의 국제음악영화제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순간 나는 영화에 푹 빠지고 말았다. 영화 내내 나오는 거칠거칠한 색감의 한국 소도시 배경이 편안했다. 처음 보는 영화인데 영화를 다 알 것 같은 익숙함이 가득했다.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컸다. 공형진의 연기가 징그러울 정도로 폭발하는 영화였다. 공형진이 연기한 인물 부상용은 진짜 광기에 싸인 사람이었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피부 안에 있는 게 상식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시뻘건 존재라는 경고가 느껴지는 사람. 웃고 있거나 기운이 빠져 있어도 타인을 겁먹게 만드는 사람. 그의 아내로 정유미가 나오는데 괴물 앞에서 알짱거리는 미친 병아리 같아서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김태우가 분한 구경남은 이름부터가 그래서 그런지 사건 속에 있는데도 ‘나는 모르오’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었고 그게 관객을 열 받게 하는 지점이었다. 늘 어벙한 얼굴로 잘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전혀 성장하지 않는…. 아, 왜 찔리는 기분이 드는 것인가. 영화제 실장인 엄지원은 미묘한 곳에서 날카로워지는 사람이라 등장할 때마다 사람을 긴장시켰다. 꾸질꾸질한 뒷모습으로 배경처럼 등장한 인물이 하정우라는 걸 알게 된 순간에는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영화가 찝찝하고 의미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김연수가 연기한 인물은 술자리에서 강간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는데 그것이 유머러스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불쾌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즐거웠다. 메밀국수 같은 영화였다. 우리 프로젝트의 마지막 영화로 적절했다.


이제껏 우리가 쓴 글을 죽 보면서, 나는 내가 영화를 소재로 두고 글을 쓰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냥 나의 신변잡기를 영화를 빌려서 써 내려갔을 뿐인 작업이었다. 그냥 그 날 그 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다행이다 싶은 것은, 당신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구경남은 투자를 받아 영화를 찍는 감독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든다. 자기도 그 영화가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잘 모르는 것도 같다. 그래도 그 영화들을 통해서 영화제 심사위원이나 지방 대학교 영화과 특별 강의 같은 소소한 일거리를 얻는다. 사람들을 만나지만 구경남은 그들에게 들려줄 자기의 이야기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맥락을 알 수 없고 공감을 할 수도 없으니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꾸역꾸역 그러한 상황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리고 모든 상대로부터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비난을 받고 어영부영 상황에서 도망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영화의 탁월한 점은 제목에 있다. 상황을 오해하는 상대방을 질책할 수도 있고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나 자신을 조소할 수도 있는 제목이다. 나도 이렇게 기막힌 제목을 단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 아무튼, 우리 프로젝트는 내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굴러온 것 같다. 영화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 글을 읽어 줄 당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일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도 느끼고 시간이 없어서 버거움도 느끼고 와중에 상대에 대한 가녀린 이해도 해 나가면서. 그러면 된 거 아닐까?


당신이 저번에 한 말이 기억난다. 상담사 선생님이 자기의 생각을 말할 친구가 주변에 있느냐고. 그리고 당신은 그런 존재가 있으면 상담사 선생님을 찾을 이유가 없었을 거 같다고, 대꾸를 했다고 했나 생각을 했다고 했나, 그렇게 말했었다. 이 프로젝트가 참 웃긴 게, 우리는 각자 생각을 서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상대에게 지면을 넘긴 것이었다. 상대가 쓴 글에 대한 별 코멘트도 달지 않았다. 나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상대가 내 글을 어떻게 읽을지, 심지어 읽을지 말지도 상대의 자유에 달려 있지만, 그래도 상대가 자신의 글을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는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고 글이라는 형태로 생각을 풀어놓으면 그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건 상대에게 나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으리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큰 안정감을 주었다.


우리는 앞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게 많을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상대에 대해서. 그래도 우리는 계속 말을 해 나갈 거다. 그 모습이 비록 구경남처럼 멍하고 별 발전이 없어 보이더라도. 그러면 또 뭐 어떻겠는가. 뭐, 꼭 잘 알아야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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