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서 <기록의 쓸모>를 같이 읽고 나눈 이야기
싸이월드가 결국 문을 닫았다.
진작 예정된 수순이었고, 백업할 시간도 충분했다. 나는 결국 못 했다.
2009년에 처음 시작해서 2011년에 페이스북으로 옮겨가기까지 약 2년 정도 깨알같이 글 참 많이 올렸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막상 그 기록을 어딘가에 옮겨서 영구히 간직하겠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잘 안 났다. 왜일까. 주변에서 싸이월드 백업에 열 올리는 모습을 보면 죄책감도 들었다.
망설이며 보낸 1년. "백업하지 않겠어"라고 선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업하겠어"라고 선택하고 행동에 옮긴것도 아니고, 그렇게 애매하게 내 20대의 기록을 떠나보냈다.
매일 무언가를 기록하는 데 열 올리는 주제에, 정작 기록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잘 없다. 이래도 되는건가? 내게 기록은 무슨 의미이고, 다른 사람들은 기록을 어떻게 남기고 또 활용하고 있을까? 일요일마다 책 읽고 만나는 독서모임 매거진 <일요일엔 책을>. 오늘은 마케터의 기록습관을 엿볼 수 있는 책인 <기록의 쓸모>를 같이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눠 본 이야기를 전한다.
이 모임, 그럴 줄 알았지
우리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벌써 몇년째 주말 아침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만나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야깃거리가 필요하다. 일요일을 함께 보낸 시간이 쌓여가면서, 멤버들이 각자 이야깃거리를 기록하는 스타일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알 수 있게 됐다.
책에 바로 인덱스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어두거나 해서 표시하는 사람, 그 표시된 페이지에 밑줄 긋고 연필로 끄적끄적 적어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애초에 귀중한 책에 낙서하는 걸 극혐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종이책을 매번 사느니 지역 도서관에서 부지런히 빌려오는 사람도 있다.
아쉽게도 이 관찰결과를 이야기해주질 못했네. 다들 언제 이런 걸 지켜봤느냐며 소름끼쳐 했을텐데 말이다.
책에 무언가를 직접 표시하거나 적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별로 안 좋아한다. 몇년전만 해도 인상깊은 구절을 노트에 빼곡하게 필사해두곤 했는데, 요즘은 손글씨 자체를 잘 안 쓰다보니 필사도 힘이 들어서 방법을 바꿨다. 대부분 전자책으로 읽으니까 디바이스를 툭툭 조작해 하이라이트를 해 둔다. 독서모임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이 있거나, 내 생각을 좀 더 덧붙이고 싶은 경우에는 구글독스를 켜서 메모를 만들어두기도 한다.
각자 선호하는 아날로그 노트 브랜드가 무엇인지도 한참 이야기했다. (몰스킨의 브랜드 철학이 마음에 들어 몇년째 몰스킨 노트를 고수한다는 멤버 A, 몰스킨은 종이가 얇아 만년필로 쓰기 불편하다며 Rhodia를 추천한 멤버 B, 그리고 가볍고 심플해서 잘 쓰고 있는 미도리 노트를 화면에 들이댄 나까지. 아니나 다를까 노트 고르는 데서도 각자의 원픽이 있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는 우리들에게 기록은 우리 삶과 아주 가까운 문제다. 그러니 기록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수밖에.
기록의 쓸모
이 책을 고른 멤버 A는 퇴사하고 스타트업을 창업해 혼자 일하고 있다. 혼자 일하면서 겪는 고충이 많이 있지만, 요즘은 기록이라는 테마에 꽂혀서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회사에 속해있을 때는 나의 기록을 그때그때 다른 사람에게 공유해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혼자 일하는 시간은 대부분 자문자답의 시간이다. 회사 다닐때에 비해 업무속도가 많이 느려진 것 같다고.
여기에 더해서, 직장인일때는 완성된 기록을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둘 수 있어서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저장이 됐다. 반면 혼자 일하고 나서는 기록을 남기는 프로세스를 온전히 혼자 정립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기록이 잘 안 남는단다.
한편 직장인들에게도 기록에 대한 고충은 있다. 사실 회사에서 만든 작업물은 회사 것이니 내 것이 아니다. 보안 문제로 외부 유출도 안 된다. 연차가 쌓이면서 회사 데이터베이스에는 내 이름으로 된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회사 밖에서는 내 성과를 증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한 주 한 주 새로운 책을 접하다보면, 우리 모임 멤버들이 특히 마음에 들어하고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책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주 책 <기록의 쓸모>도 반응이 꽤 괜찮았다.
이 책을 쓴 이승희 작가는 2014년부터 배달의 민족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영감들을 꼼꼼히 기록해 '영감노트'라는 인스타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기록을 주제로 책까지 썼다.
평소 기록을 좋아하는 우리들인데, 그 기록을 잘 활용하고 있는지를 물으면 자신이 없어진다. 우리들이 막연하게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떡밥을 던져줬다고 할까. 다들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작가의 경험도 물론 값지지만, 내 경우에는 내가 잘 아는 우리 모임의 멤버들이 각자 왜, 그리고 어떻게 기록하며 사는지에 대해 공유할 수 있어서 더 즐거웠다.
내가 기록하는 방법
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서두에 싸이월드 이야기를 했는데,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싸이월드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경험이 내게는 꽤 상처가 됐다. 나는 변화가 싫다. 어떤 플랫폼도 내게 영속성을 담보해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놈에게 기대고 싶다. 그래서 내 픽은 구글독스랑 페이스북이다.
에버노트를 메모 어플로 활용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프리미엄 서비스가 도입되더니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해져서 구글독스로 옮겼다. 구글독스는 외국어로 글을 쓸 때 자동으로 교정교열을 해 줘서 좋다. 구글드라이브와 결합하면 내 PC를 클라우드에 옮겨놓은 것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한편 여행가서 찍은 사진이나 그때그때 책 읽고 느낀 감상 같은 건 페이스북에 비공개로 올린다. 차곡차곡 쌓아두면 "N년 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과거의 기억을 큐레이팅 해서 보여준다. 마치 예전 일기장을 넘겨보는 느낌이 든다.
손글씨를 안쓴다 안쓴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글씨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그리울 때가 있어 무지노트와 볼펜을 어디든 들고다닌다. 이 노트에는 뭔가 의미가 있는 기록은 없다. 그냥 그때그때 기억하고 싶은 외국어 단어나, 복잡한 구조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 의미단위별로 쪼개 본 흔적들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다. 한 권을 다 쓰면 주저없이 버린다.
구글독스든 페이스북이든 최소 문단 단위의 기록에 어울린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말도 많고 글도 길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으로는 머리에 잘 안 들어오고, 단어와 문장이 결합되어 의미구조를 가진 문단이 되면 그제서야 머리에 들어온다. 나에게 어울리는 기록은 이런 것이다.
그 전에는 나 스스로도 생각 정리가 잘 안 되었는데, 우리 모임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리가 됐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에게 어울리는 기록은 어떤 것인지.
타인의 기록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기록하냐면.
멤버 B는 예전부터 메모 어플에 관심이 많았다. 나에게 실망감을 준 에버노트를 처음 추천해 준 것도 B였다. 에버노트, 큅, 노션을 돌아가며 쓰고 있는데 요즘은 특히 노션을 쓰는 비중이 높다고 한다. 내가 에버노트 기록을 어디 옮기지도 못하고 찝찝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B는 새로운 어플에 정착하면 예전 어플의 기록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서 실행에 옮긴다.
멤버 C는 직업상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데, 아이디어로 쓸만한 생각이 떠오르면 재빨리 남겨둔다고 한다. 카카오톡, 핸드폰 메모장, 녹음, 인터넷 북마크, 유튜브 재생목록 등에 쌓아두고 틈날때마다 열어본다고.
멤버 D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우리는 9시부터 6시까지 회사에 묶여있다. 회사에서의 기록은 내 것이 아니니, 내 기록을 하려면 결국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데, 밥도 먹고 잠도 자야하니 실제로 하루에 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한정적이다. 기록하고 싶은 게 많지만 시간이 모자라서 답답했단다. 언젠가부터는 그때그때 테마를 정해서 노트 한 권에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가령, 요즘은 부동산에 관심이 생겨서 부동산 거래에 필요한 서류나 세금 등등을 공부하고 있다고. 노트 한 권이 하나의 프로젝트인 셈이다. 이렇게 하니 뭔가 쌓이는 느낌이 들어서 만족스럽다고 한다.
멤버 E는 생각을 정리할 때 엑셀을 사용한다고 한다. 생각이 많아 복잡할 때 엑셀표에 적어보면 생각이 정리된다고. 이건 정말, 나랑 완전 반대다. 나는 순도 100%의 텍스트 인간이라 업무적으로도 데이터를 정리할 때가 아니면 엑셀은 잘 안 쓴다.
나는 내 기록을 잘 정리 못 하는 편이다. 기록하는 데 보내는 시간에 비해 기록을 정리하는 데 보내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고, 그나마도 솔직히 억지로 한다. 그래서 멤버 F의 이야기가 매우 놀라웠다. 그는 여러 기록 중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걸 따로 모아놓고,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과거의 기록을 읽어본다고 한다. 읽고 끝나는 게 아니라, 기록을 읽으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밑줄긋고 메모를 남겨놓거나 한단다.
그러고보니 기록을 이야기하면서 브런치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2년 전 일본에 처음 와서 나는 늘 눈을 크게 뜨고 다녔다. 신기한 게 너무 많았다. 신기한 걸 발견할때마다 생각을 정리해서 페이스북에 장문의 포스팅을 올리곤 했는데, 그걸 본 멤버 A가 내게 글이 재미있으니 블로그를 해 보면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주었다. 나는 사실 다른 사람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닌데, 신기하게도 그 때 A의 말이 깊이 와닿았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걸 A가 구체화시켜줬던 거려나. 용기를 얻어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그 후로 2년도 넘게 활동하며 무려 85개째의 포스팅을 올리고 있다.
내 기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기록을 잘 정리 못하고, 기록한 걸 다시 돌아보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브런치는 좀 다르다. 브런치는 착하게도 내 글을 작품이라고 불러준다.
그가 내 글을 작품이라고 부를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작품이 된다.
하나하나 글 쓸때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도 들고, 다 쓰고나면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문장도 고치고 한다. 그렇게 쓴 글이라, 구글독스에 휘갈겨 올려놓는 기록들이랑은 아무래도 좀 다르다. 더 소중하다. 다시 읽으며 이 떄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라고 공감할 때도 있다.
독서모임에 대해 글 쓰기 시작한지도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대화를 글로 옮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회의록처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얻은 걸 내 생각으로 정리해서 옮기고 싶어서 시간도 꽤 걸린다. 그래도 무척 가치있는 시간이라고 느낀다.
멤버 A가 스타트업에 일하는 경험을 자문자답의 시간이라고 했는데, 해외에서 혼자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자문자답의 시간이다. <일요일엔 책을> 매거진의 글을 쓸 때면 같은 자문자답의 시간이더라도, 누군가와 나눈 대화에 대해 자문자답하는 거다보니, 생각이 갇히지 않고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이 고양감을 나 혼자 남겨놓고 말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어서, 계속 쓴다.
매번 라이킷 눌러서 응원해주시는 여러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주에는 영화감독 17명의 데뷔 전 개고생 스토리를 옴니버스 식으로 전달하는 <데뷔의 순간>을 읽고 나눈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