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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Aug 03. 2020

30대에 꿈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독서모임에서 <데뷔의 순간>을 읽고 나눈 이야기

독서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하는 매거진 <일요일엔 책을>, 오늘 다룰 책은 현역 영화감독 17명의 인터뷰를 묶어 만든 <데뷔의 순간>이다. 이번주는 좀 늦어졌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 뒷맛이 썼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이유는 차차 전하기로 한다.





왜 이런 책을 읽게 되었냐면


우리 모임에서 고르는 책들은 대체로 일관성이 없다. 요즘은 해외에 있는 멤버들이 많아서 책을 고르기 전 전자책 출간이 되어있는지를 확인해본다는 것 정도가 공통점일까? 한 주는 소설책을 읽고, 한 주는 경제책을 읽고, 한 주는 철학책을 읽고, 뭐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데뷔의 순간>은 좀 생소했다. 현역 영화감독이 데뷔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쓴 책. 왜 이런 책을 선정했을까?


책을 고른 멤버 A는 평소에 영화를 좋아한다. 한 발짝 나아가 영화 아카데미에 등록해서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써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A의 꿈을 응원한다며 친구가 이 책을 선물해준 게 어느덧 몇 개월 전의 일이란다. 흥미로운 책이기는 한데 여러 편의 짧은 이야기가 묶여있다 보니 잘 모르는 감독 이야기는 왠지 진도가 안 나갔다. 마음의 부채(?)로 남은 이 책을 기왕이면 독서모임 멤버들과 같이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골랐다고 한다.


그렇구나. A에게 <데뷔의 순간>은 언젠가 자신이 걷게될지 모를 길을 미리 걸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A의 감상도 그랬다. 그들만의 세계 속 사적인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알려줘서 재미있게 읽었단다.



빛나는 성공기, 그 뒤에는


나도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데뷔의 순간>에 이야기를 공유해 준 17명의 영화감독 중에는 이름만 딱 봐도 대표작이 떠오르는 감독도 있고, 필모그래피를 보면 "아, 이런 영화가 있었지"라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감독도 있다. 어쨌든 이 감독이 만든 영화를 하나라도 본 적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감독이 절반 이상은 됐다. 그 영화가 좋았든 그냥 그랬든 말이다.


그래, 그들의 데뷔가 당연히 힘들거라고는 생각했다. 예술계가, 영화계가 많이 힘들다고 다들 이야기하니까. 실제로 그 지난한 과정을 텍스트로 보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 영화를 만든 김대승 감독은 감독 데뷔 전 연출부 생활을 10년이나 하면서 돈을 채 2천만원도 못 벌었다고 한다. 1년에 2천만원이 아니고, 10년 동안 번 돈을 다 합쳐서 2천만원이다. 세상에.


이 이야기를 보며 내가 느낀 건, 아, 이 업계에는 내 생각보다도 더 부조리가 만연해있구나. 10년에 2천만원이면 1년에 2백만원, 월급으로는 15만원에서 20만원을 겨우 받았다는 소리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감독들은 젊을 적 갖가지 고초를 겪고 결국 "데뷔의 순간"을 맞아 감독이 됐다. 적어도 글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정서에 후회는 없다. 그래, 이들의 경우에는 갖가지 고초 끝에 성공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는 우리가 모르는 감독지망생이 수도 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10년에 2천만원 받으며 영화판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고, 영화판을 떠나서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성공기를 읽으며 성공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성공기를 읽으며 실패에 대해 생각한다. 나도 20대를 지나 30대를 맞으면서 꿈 뒤에 현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일 것이다.



성공으로 가는 길?


A가 분석해 준 바에 따르면, 이 책에 등장하는 영화감독들은 30세에서 35세 사이 데뷔했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40대 초중반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도 한 때는 영화판의 '젊은 기수'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중견급 이상의 연차가 쌓여 새로운 '기성세대'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의 여정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충무로에서 도제식으로 배워서 데뷔하기.

두 번째,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늦깎이로 공부한 후 데뷔하기.

세 번째,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기.


광고제작자로 일하다가 영화감독으로 전향한 이준익 감독의 사례나,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 와 사재를 털어 만든 데뷔작으로 영화감독이 된 홍상수 감독의 사례를 세 번째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길을 택하든, 영화감독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소설이나 미술처럼 나 혼자 고민해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투자를 받든 사재를 털든) 상당한 초기자본이 필요하고, 나를 믿고 영화를 만들어 줄 연출부가 필요하고, 배우도 섭외해야 한다. 영화감독은 이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목표 아래 협업할 수 있게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 데뷔한 다음에는 나의 데뷔작을 레퍼런스 삼을 수 있지만, 데뷔하기 전에는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어려우니 연출부 생활이 됐든 영화 아카데미가 됐든 끝내주는 시나리오가 됐든 뭔가 '나만의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


정리하고 보니 분야가 달라서 그렇지 우리에게도 아주 먼 이야기는 아니네.


지난 20대에 우리는 얼어붙은 취업시장 속 '나만의 무기'를 준비하려고 애쓴 끝에 직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지금 직장에서 어느정도 연차가 쌓여가는 동안에 어느덧 30대가 되었지만, 우리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은 끝나지 않았다. 회사 안에서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때로는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이직하기 위해 끊임없이 앞길을 고민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감독들처럼 말이다.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영화 나도 봤다. 권상우랑 김하늘이 나왔다는 것 정도가 기억난다. 아주 재밌게 보긴 했는데, 영화관 문을 나서고 나면 내가 뭘 봤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 종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김경형 감독은 KBS에 입사해서 방송연출 일을 하다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잊지 못하고 호기롭게 퇴사했다. 충무로에서 연출부 생활을 하며 특별한 수입 없이 지내던 시간이 무려 5년여. 영화감독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김경형 감독도 자기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동갑내기 과외하기> 시나리오를 제안 받았다고 한다.


"어휴…… 요즘에는 그런 것도 영화가 된대?"
안방에 들어가 갓 태어난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보니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데뷔를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다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이 짧은 인용구 안에서 그의 고민이 가감없이 보인다.


나는 이 지점에서 김경형 감독이 현실과 타협하여 <동갑내기 과외하기> 감독이 되기로 하는 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그 기회가 100%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어쨌든 그 기회를 잡아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반면,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멤버 B의 의견은 좀 달랐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김경형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동갑내기 과외하기> 이후에는 그닥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흥행몰이를 하긴 했지만, 여러 의미로 임팩트가 강한 작품이다. 데뷔작의 이미지가 강해 오히려 다음 작품을 잡기가 더 어려워졌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믿고 하고싶은 일이 나타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더라면 어땠을까?



C가 던진 폭탄


멤버 C가 폭탄(?)을 던졌다.


우리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자기 꿈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사람을 멋지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될 게 뻔한데 포기하지 않고 한 길을 고수하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시선이라는 게 결국,
성공을 찬양하고 실패를 비난하는 거 아닌가?


솔직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치관의 차이일까. 급히 빈센트 반 고흐 이야기를 했다. 그는 죽어서 위대한 화가가 되었지만, 살아서는 그림 판 돈으로 물감도 제대로 살 수 없었다. 나도 고흐 그림을 좋아하지만, 누군가 나한테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가 될거야"라고 말하면 "왜?"라고 물을 것 같다.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해?


결국 삶을 바라보는 나의 자세와도 일맥상통 하는 이야기다. 무언가를 하고싶은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전에 가능성부터 생각한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일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까?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도 성취하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마음이 마구 불편해졌고, 평화로웠던 내 마음에 이런 폭탄을 던진 C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안의 모순을 까놓고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데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간 막연하게 느꼈던 답답함이 조금 더 명확하게 다가왔다.



불편함의 뒤엔


자기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은
착각이라도 하며 살아야 그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미쓰 홍당무>를 만든, 방은진 감독의 말이다. 보통은 책을 읽을 때 공감되는 부분에 밑줄을 친다. 이 경우에는 너무 공감이 안 되는 말이라서 밑줄을 쳤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은 착각이라니. 그런 거 잊어버린지 너무 오래됐다.


당장 나 자신에게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가 없으니, 누군가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을 보면 걱정부터 된다. 저 사람 괜찮을까? 재능도 없으면서 괜히 시간낭비 하는 거 아냐? 그냥 잘하는 일에 집중하면 진작에 자리 잡지 않았을까?


이런 태도 자체가 어쩌면 걱정을 가장한 폭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못해. 그러니까 너도 하지 마. 왜냐하면 네가 도전했다가 혹시 성공하기라도 하면 배아프니까. 아니 이건 좀 너무 나갔을 수 있지만. 그래도 타인의 용기를 평가절하할 때 내 마음 속 깊숙이에 이런 비뚤어진 감정이 아예 없는가, 하면 딱 잘라서 없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체리필터의 노래 <Happy Days>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난 내가 말야 스무살쯤에 요절할 천재일 줄만 알고" 감수성이 풍부하던 소녀 시절 선데이수도 그런 착각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 라일리가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상상의 친구 빙봉을 떠나보내듯, 어느 순간 착각을 떠나보내고 어른이 됐다.


어릴 땐 어른이 된다는 게 무조건 좋은 줄만 알고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어른 참 별 거 없다. 나의 현재를 지키기 위해 미래의 불확실한 가능성에 섣불리 도전하지 않기로 하고, 때로는 하고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 사이에서 현실과 타협하며 지내고 있다.


글 서두에 모임이 끝나고 뒷맛이 썼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차차 설명하겠다고 했다.


뒷맛이 썼던 이유, 분명히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17명의 영화감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책을 매개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만, 대화의 끝에는 항상 내가 있다.


불편했다. 그래도 그 불편함이 싫지 않다.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때보다,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 때 앞으로의 내가 손톱만큼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의 교훈은 이렇다.

다른 사람의 꿈에 대해서 내 기준만 가지고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겠다.





독서모임 매거진 <일요일엔 책들>, 다음 책은 최근 미국에서 화제라는 파이어(Fire)족에 대한 이야기다. 5년만에 1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모아 30세에 경제적 자유를 이뤄 낸 저자의 경험과 방법을 나눈 책 <파이낸셜 프리덤>을 읽고 나눈 이야기를 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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