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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Nov 10. 2018

일본 민숙(民宿)에서 묵어가다, 고부치자와(2편)

불이 꺼지면 칠흑같은 어둠이 몰려오는 시골, 할아버지가 차려준 아침상

고부치자와에서는 민숙에 묵었다. 한국의 민박과 비슷한 일본의 숙박시설이다. 젊은이들은 에어비앤비를 하고, 아직 거기 적응하지 못한 윗세대들은 민숙을. 뭐 그런 거려나.


산 속 마을 민박이라니 좀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지도를 보니 대형 리조트 바로 옆에 붙어있어서 안심이 됐다. 뚜벅이라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이동이 걱정인데 리조트 옆이라면 리조트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얻어탈 수 있을 것이다. 또 리조트 손님들이 저녁에 식사해야 하니 밤에도 너무 캄캄하지 않겠지.


그래. 난 일본어도 할 수 있으니까! 도전해보자!


셔틀버스를 얻어탄 김에 리조트에 잠깐 내려 구경했다. 마침 위켄드 마켓이 열렸다. 마치 유럽의 어느 소도시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리조트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시골길 풍경. 고부치자와 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호시노 리조나레에 내린 다음, 시골길을 걸어서 5분 정도 더 가야 한다.
숙소로 접어드는 길. 왼편 흰 건물 뒤쪽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물이 바로 펜션 워밍엄(Warming-up).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큰 2층집이다.


리조트에서 걸어서 5분 정도. 차 조심 해 가며 시골길을 걸어오니 소박한 2층집이 눈에 띄었다. 현관에서 종을 울리자 주인 할아버지가 읽던 책을 덮고 나오셨다. 너희 밥은 먹었냐, 오늘 비가 오던데 우산은 챙겨왔냐 등등을 살뜰하게 묻는다. 그 동안에 어디서 놀다왔는지 할아버지 손자처럼 보이는 어린애들이 나타나 양말을 벗고 씻으러 간다. 아마, 이 집의 1층은 대가족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고 2층에 손님방을 꾸며둔 모양이다.


왼쪽이 현관, 오른쪽이 거실 겸 식당이다. 각종 식기나 어린애들 그림책이 정리되어 있다. 호텔 같은 깔끔함이라기보다는, 당장 편히 꺼내쓸 수 있을 것 같은 생활의 풍경.
식당 풍경. 커다란 창 밖으로 작은 꽃밭을 꾸며놓았다. 저녁은 저녁대로, 아침은 아침대로 원목 가구에 자연광이 내리쬐어 따뜻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공간.
마침 수국철인지, 비가 와서 물기를 가득 머금은 수국이 창 밖에 흐드러졌다. 좋구나.


땅값 비싼 도쿄에 있다 와서인지 이 곳의 널찍널찍한 공간감이 익숙지 않다. 2층 침대방에 짐을 풀어놓고, 샤워실과 공용공간 사용방법을 안내받았다. 그 날 손님은 딱 두 팀. 샤워실이 두 개인데, 다른 손님은 물론 집 주인 가족들도 씻어야 하는 공간이라 순서를 잘 기다렸다가 이용해야 한다. 샤워실에는 평소 할아버지와 손주들이 쓰는 물건이 그대로 놓여있다. 샴푸든 수건이든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쓰라고 한다.


저녁을 안 먹고 와서 배가 고팠다. "사장님,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있나요?" 그 말에 커다란 관광지도를 가져와 설명을 해 주신다. "여기는 이탈리안이고요, 여기는 사슴고기가 맛있어요." 입맛을 다시는데 창 밖으로 빗발이 굵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는 못 가겠구나. "우산 없죠? 저기 장우산을 가져가요."


그렇게, 멀리도 못 가고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사슴고기 집에 들어왔다.


사슴고기 야키니쿠 정식. 산지가 많은 야마나시니만큼 아마 근처 어딘가에서 공수해 온 사슴고기가 아닐까. 신선한 야채까지 푸짐한 한 상을 받았다.
고기가 얇아서 금방 익으니, 한두점씩 1인용 화로에 올려서 구워먹는다. 소고기와 양고기 중간 정도로 육향이 강하고, 육질이 너무나 부드럽다. 무한정 들어갈 것 같은 고기다.


고부치자와는 참 웃기는 동네다. 사슴고기 집도 웃겼다.


사슴고기에 술 한 잔 곁들여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데 웬 다섯명 쯤 되는 가족이 우르르 들어온다. 손님인가 했더니 그냥 이웃 주민들인 것 같다. 메뉴판도 없이 "저는 이거 만들어주세요" 하면서 왁자지껄 맛있게 밥을 먹고 떠든다. 그 왁자지껄한 열기가 옆 테이블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배부르게 밥을 다 먹고,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캄캄한 산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손주들이 자러 들어갔는지 숙소가 아주 조용하다. 아담한 침대방에서 창 밖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깜빡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창 밖에 울창한 숲과 아침이슬 머금은 햇살. 이런데서 살면 분명 건강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가 분명 아침을 준비해주신다고 했는데, 하며 쭈뼛쭈뼛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디서 커피향이 솔솔 난다. 커피 한 잔 하며 다른 팀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사장님 부부가 주방에서 달그락달그락 만들어 주신 아침상이 나왔다. 가족들 먹으려고 직접 구운 빵에, 야마나시현 야채로 만든 샐러드, 에그스크램블, 소세지,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까지.


아직도 가끔 이 날 아침상이 기억난다.


전날 밤 그렇게 칠흑같은 어둠으로 덮였던 산골마을에 아침해가 떠올라 사방이 눈부신 아침이었다. 사장님 부부가 정성껏 가꾼 풀냄새와 꽃냄새가 창문 너머에서 솔솔 들어왔다. 거기에 빵 냄새 커피 냄새가 뒤섞였다. 눈으로 본 것은 사진으로 담아둘 수 있는데, 코로 맡은 냄새는 무엇으로도 저장할 수가 없어 아쉽다. 내 기억 속 서랍에 잘 간직해뒀다가, 가끔 꺼내본다. 때로는 사진에서 냄새가 맡아지기도 한다. 킁킁. 


조식 한 상. 음식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 담겨있다. 맛있다. 특히 커피가 정말 맛있어서 세 잔은 갖다먹은 듯.


너무나 우연한 기회로 나와 인연이 닿은 여행지 고부치자와. 이 곳에서 조금은 시시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났던 고원열차를 타고, "대체 왜 이런 곳에 이런 미술관이?"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 키스해링 미술관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할아버지의 2층집 방 한 칸을 내어주시는 민숙에서 편안하고 따스한 경험을 했다.



선데이수를 소개합니다.
필자 선데이수는 2018년 초부터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를 기점으로 주말이나 연휴를 이용해 주변 소도시를 여행했습니다. 스스로를 '기차 덕후'로 소개합니다. 기차 구경도, 기차 타는 것도 좋아합니다. 신칸센처럼 빠른 기차보다는 느릿느릿 달리는 로컬 기차를 더 좋아합니다. 기차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떠났습니다. 때로는 단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때로는 단 한 마디의 키워드를 보고 여행지를 결정하는 '즉흥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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