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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Apr 14. 2019

호스텔에서 만난 인연, 이즈 기차여행 (2편)

다다미방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20대 초반 배낭여행을 다닐 때 숙소는 게스트하우스로 정해져있었다. 1박에 5만원이면 하룻 밤 묵어갈 수 있었다. 운 좋으면 거실에서 여행자들끼리 수다 떨다가 야경도 보러 나가고 다음 날 일정을 함께할 수도 있었다. 운 나쁘면 같은 방에 시끄럽게 코 고는 사람이 있을 때도 있다. 뭐, 괜찮았다. 옆에서 누가 코를 골든말든 무던하게 금세 잠들고, 심지어는 내가 더 크게 코를 골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도미토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시간이 피곤해졌다. 밤에는 그냥 나 혼자 편안하게 쉬고 싶어졌다. 돈을 더 내고라도 나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예약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런데 뭐, 사람 일이 뜻대로만 되던가?


이즈반도의 숙소를 뒤지다가 매력적인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했다. 가격은 물론이고 스토리도 매력적이었다. 100년 전에 지어진 유형문화재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곳이라고. 괜히 피곤하지 않을까? 막연한 망설임을 이기고 용기를 내 보았다. 이 작은 선택이 이즈반도 여행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즈반도에서의 첫날은 거의 기차 안에서 보냈다.


시골답게 열차 간격이 길었다. 역마다 정차 해 가며 느릿느릿 갔다. 차 타고 가면 금방 갈 거리도 세월아네월아 시간이 걸렸다. 이즈고원에서의 히가에리(당일치기) 노천 온천으로 마지막 일정을 보내고 이토역에 도착하자 어느덧 시간이 8시가 넘었다. 따뜻한 이불에 몸을 녹이고 싶었다.


호스텔 앞에 작은 개울이 흐른다. 전날 비가 와서인지 밤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기분좋게 잠들 수 있었다.


어두워서 외관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봐도 좋은 숙소인 게 느껴졌다. 외관에서부터 100년의 시간이 느껴지는 멋진 건물이었다. 리모델링을 잘 해 놓아서 실내가 무척 깔끔했다. 계단을 오를 때 삐걱이는 소리가 나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정도.


삐걱삐걱 하며 내 방을 찾아 문을 열었다. 정원은 다섯 명.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있고 인원수별로 이불이 준비되어 있다. 나무 칸막이로 나름대로 개인공간도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점은, 호스텔 앞에 작은 개울이 흐른다는 것. 창 밖으로 개울소리가 잘 들리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자는 내내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간질여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에서만 살아 온 내가 언제 또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겠는가. 기대하지 않았던 행복 포인트였다.


방충망 따위 갖다 버려! 라고 말하는 듯 호방한 창문. 아침햇살을 받으며 창 밖을 내다보자, 높은 건물이 없어 시야가 탁 트였다.


친구도 만들었다. 베를린에서 왔다는 키 큰 독일 여자아이 - 말레나라고 했다 - 였다. 그녀는 베지테리언으로, 일본어가 서툴러 밖에서 사먹는 음식이 베지테리언에게 적합한지 아닌지를 알기 어렵다는 이유로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다가 우동을 만들어 먹고 있었다.


베지테리언일수록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다면서, 우동 안에 두부랑 팥을 넣었다고 자랑을 한다. "우동에 팥을 넣다니 이런 거 먹어본 적 없어!" 라고 솔직한 반응을 보였더니 베지테리언에게 팥은 중요한 영양공급원이라고 하면서, 궁금하면 한 번 먹어보라고 권한다. 저녁을 먹지 못해 배고프던 참에 이렇게 반가운 제안이 어디 있으랴. 사양 않고 우동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따뜻하게 데운 우동을 나눠먹으며, 우리는 거의 세 시간 이상을 마주앉아 지치지도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말레나는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어 이야기가 잘 통했다.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삶, 이즈반도까지 여행을 오게 된 사연, 서로의 직업과 장거리 연애 등등에 대해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개울을 따라 주변을 산책했다.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 난 모습을 보면 아주 빈틈없이 관리되고 있는 공원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말레나의 다음 일정은 도쿄라고 했다. 도쿄에 놀러와. 내가 구경시켜 줄게.


정말로 며칠 뒤에 우리는 도쿄에서 다시 만나 생선구이 정식을 먹고 마루노우치 인근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차례로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날 더러 베를린에 놀러오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고 신신당부 하며 헤어졌지만 글쎄, 아마도 짧은 시일 내에 베를린에 가 볼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여행자의 인연이 그런거지. 낯선 도시에 가 어리버리하면서도 누군가의 과분한 친절을 받아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와서는 어리버리해 하는 누군가를 만나 조건없는 호의를 베푸는 것.


몇 년 만에 호스텔에 묵기로 한 결정 덕분에 이런 인연, 이런 경험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선데이수를 소개합니다.
필자 선데이수는 2018년 초부터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를 기점으로 주말이나 연휴를 이용해 주변 소도시를 여행했습니다. 스스로를 '기차 덕후'로 소개합니다. 기차 구경도, 기차 타는 것도 좋아합니다. 신칸센처럼 빠른 기차보다는 느릿느릿 달리는 로컬 기차를 더 좋아합니다. 기차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떠났습니다. 때로는 단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때로는 단 한 마디의 키워드를 보고 여행지를 결정하는 '즉흥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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