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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Mar 21. 2019

존 레논이 여름을 보낸 그 곳

도쿄 근교 가루이자와 만페이 호텔에서 하룻밤 묵어간 이야기

겨울에서 봄 사이, 설레는 마음에 얇은 겉옷 차림으로 나왔다가 하루종일 덜덜 떨게 되는 계절. 이번주에 도쿄는 최고기온이 17도까지 올라가 무척 따뜻했다. 성격 급한 몇몇 벚꽃나무들이 때 아닌 핑크빛을 주장하는 이 때, 도쿄보다 기온이 7~8도 이상 낮은 산 속 마을 가루이자와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줄곧 날씨가 좋다가 돌아가는 날 싸락눈이 내렸다.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눈 내리는 가루이자와역 인증샷을 찍었다.


가루이자와에는 지난 여름에 이미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이 있다. 신칸센을 타면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니 꽤나 가까운 거리 같지만, 실상 도쿄에서 왕복 교통비만 10만원이 넘어가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휙 다녀올 기분이 들지는 않는 곳이다. 당일치기로 끝내기에는 조금 아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1박2일로, 그리고 저번 여행에서 영 탐이 났던 만페이 호텔에서의 숙박을 계획해보았다.


# 관련글 : 고원의 낭만, 가루이자와에 가다


만페이 호텔은 어떤 곳인가. 18세기 후반에 가루이자와에 머무르는 여행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식 료칸이던 것을, 1894년에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가루이자와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리모델링 이후로도 100년이 넘는 시간 안팎으로 큰 변화 없이 버텨 온 것 같다. 시설이 눈에 띄게 낡았지만, 낡았다고 해서 초라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고풍스럽게 보인다. 정성스럽게 관리를 한 흔적 덕분이다. 촌스러움도 어느 선을 넘어가면 멋지게 보일 때가 있달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개항 이후 근대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점이 참 부럽다. 분명 서양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느껴지지만, 유럽에 가서 구경하는 그 시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한국인에게 이 시대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린 과거이기에, 가급적이면 그 시대의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허물어버린 케이스가 많다. 근대를 건너뛰고 현대로. 물론 여기에도 장단점이 있겠지만, 아름다운 것을 감상하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의 한 챕터를 즐길 수 없게 되어 아쉽고, 일본에서 그 챕터를 발견하면 음, 묘한 기분이 든다.


중후한 느낌의 붉은 카펫과 어두운 목재로 꾸며진 실내 인테리어.


그런데 사실 만페이 호텔이 더욱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여름마다 가루이자와의 이 호텔에 묵었다는 것.


존 레논은 보석같은 이 곳 가루이자와의 매력에 푹 빠져 1980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기 전 4년 동안이나 여름만 되면 만페이 호텔 128호에 묵으며 호텔 안의 바에서 칵테일도 마시고, 아침이면 바게트도 사러가고 했단다.


만페이 호텔의 정면. 따라그린 듯 가지런한 삼각형 모양이 두드러지는데, 이 모양을 호텔 로고로도 쓰고 있다.


이런 스토리를 듣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나. 사실 숙박비가 아주 비쌌다면 한 번 더 생각해봤을텐데, 인당 12~13만원 정도에 해결이 가능해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주한 만페이 호텔. 가루이자와 관광의 중심지인 큐가루이자와 거리에서 도보 15분 정도지만, 산길이기에 해가 지거나 하면 걷기가 조금 불편하다. 프론트에서 택시를 불러주기는 하지만, 매번 180엔씩 콜 요금이 따로 붙어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역시 대중교통보다는 차를 이용하는 편이 숙박하기에 편할 것 같다.


방 안의 모습. 창문 밖으로 정원이 보이는 등 참 예뻤기는 한데, 침대와 화장실이 낡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서일까? 화장실은 거의 방음이 안 되다시피 했다.


방 안의 모습. 만페이 호텔 숙박 후 전체적인 느낌은, 서비스는 최고지만 시설은 확실히 낡았다는 것. 특히 침대가 낡아서 푹 잠들지를 못했다.


호텔 로비. 게스트를 위한 휴게 스페이스 뒤편으로 테라스 카페가 보인다. 필자는 아쉽게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는 못했지만, 커피와 디저트가 맛있어서 일부러도 찾아오는 맛집이라고 한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역시 만페이 호텔의 좋은 점은, 호텔 안의 레스토랑/카페/바가 모두 평균 이상이라는 것. 지난 9월에는 오직 만페이 호텔에 한 번 와 보겠다는 목적으로 호텔 내 일식당에 예약하고 와 훌륭한 소바에 덴뿌라를 먹은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레스토랑에서 우아한 조식을 즐기고, 바에서 칵테일 한 잔을 즐겼다.


만페이 호텔의 조식. 뷔페식이 아니라 자리에 서빙을 해 준다. 호텔 이름을 붙여 파는 잼 3종류와 함께 샐러드, 토스트, 오믈렛과 소시지 등이 코스로 나온다.


조식은 정말 최고로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멋진 식당에서 토스트에 잼과 버터를 바르고 있자니 마치 어느 나라의 공주가 된 것만 같았다. 사실 사전에 검색해보면서 조식이 뷔페식이 아니라고 해서 좀 실망할 뻔했다.. 하지만 만페이 호텔의 조식을 경험해보고 나니 뷔페식에서 욕심껏 담아왔다가 처치곤란이 되느니, 딱 아쉬울 정도로만 서빙해주는 코스식이 나을수도 있겠다고 설득이 되었다. 그만큼 즐거웠던 경험.


사진의 잼은 조식에 제공되는 잼으로 각각 구즈베리와 애플, 오렌지 마멀레이드이다. 구즈베리는 별 특징이 없었지만 애플과 오렌지 마멀레이드는 정말 맛있었다.


애플잼은 보통 사과를 으깨어 넣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 잼은 사과를 얇게 저며서 과육의 형태는 물론 아삭아삭한 식감까지 살려놓았다. 달지만 너무 달지도 않아 우아한 맛. 오렌지 마멀레이드는 오렌지를 뭘 썼는지 향기가 아주 깊었다.


이 잼들은 호텔 내 기념품샵에서도 팔고 있어서, 먹어보고 마음에 드는 잼을 떠나기 전 사가지고 갈 수 있다.


호텔 안의 바. 사진에서는 잘렸지만 왼쪽 위에 위스키병이 잔뜩 진열되어 있다.


전날 들렀던 바도 합격점. 위스키 종류가 다양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한 공간감과 편안한 인테리어, 적당한 음악 덕분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가루이자와가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도쿄나 오사카 같은 시내가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해가 지면 별로 갈 데가 없다. 호텔 안에 저녁시간을 후회없이 보낼만한 바가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만페이 호텔 숙박은 어떨까? 라는 오랜 궁금증을 해결하고 나니, 그렇다면 또 묵고 싶은 곳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아, 어렵다. 침대 정말 불편했는데.


불편함을 잊을만큼 시간이 가면, 그리고 가루이자와에서 또 하룻밤 묵어가게 된다면, 또 고려해볼 것 같다. 조식을 포함해서 식당, 바도 아주 좋았고, 모든 직원이 매뉴얼을 잘 숙지하고 있는 게 느껴지는 숙련된 서비스를 받는 것도 즐거운 포인트였기 때문.


그렇게 마무리해본다, 가루이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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