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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Jun 09. 2019

투박한 산장에서 보낸 하룻밤, 알펜루트 (3편)

정성이 담긴 전골요리로 추위에 떨던 몸을 따스하게 덥힌다.

알펜루트 세 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산장(山荘)에서 보낸 하룻밤에 대해 적어본다.


일본에서의 숙박으로 게스트하우스와 민숙까지는 경험이 있는데 산장은 또 처음이다. 다행히 알펜루트를 방문하면서 숙소를 알아보려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어서, 블로그 정보를 꼼꼼하게 따져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곳으로 예약할 수 있었다. 필자는 평소에 호텔스닷컴 스탬프를 모으고 있는데, 일본 숙박시설들은 쟈란넷 아니면 부킹닷컴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다. 이 텐구다이라 산장(天狗平山荘)도 부킹닷컴을 통해 예약했다.


산장으로 들어서는 길. 산장 주위만 눈을 치워놔서 그렇지 입구 양옆으 엄청나게 쌓여있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고원버스의 종착점이자, '눈의 회랑'과 '미쿠리가이케 온천'이 있는 무로도에서 시간 보낼 일이 많다. 텐구다이라는 무로도와는 한 정거장, 버스로 5분 거리이지만 어쨌든 길이 막혀있어 도보이동은 안 되고 반드시 시간 맞춰 버스를 타고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접근성은 약간 불편한 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아침과 저녁식사를 제공하고, 아침 먹은 후에는 무로도역까지 무료 셔틀버스도 운행하고 있다. 어차피 해가 지면 산 속에서 할 일도 없으니 저녁까지 해결할 수 있는 게 딱 좋다.


리모델링을 새로 했는지 건물이 꽤 깨끗한 편이고, 방은 다다미방에 이불을 깔고 자는 구조로 다다미 묵은내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환기 시켜놓으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이고, 샤워실은 저녁에만 오픈한다. 아침에는 세면대에서 세수와 양치 정도만 할 수 있다.


1층 식당의 풍경. 겨울 스포츠를 즐기러 오는 사람도 많은지 입구에는 보드나 스키용품 등을 팔기도 한다.


다섯시쯤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식사를 준다고 한다. 식당에 가니 숙박인원수별로 각 테이블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 맥주나 니혼슈도 원하면 따로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첫날 낮 기온이 영상권이기는 했으나 사방에 눈이 쌓여있다보니 아무래도 추웠다. 개인 화로에 데워먹을 수 있게 나온 전골요리를 보니, 먹기도 전에 이미 몸이 덥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름 푸짐하게 차려진 한 끼 밥상. 생선구이에 전골요리, 오뎅찜까지 소박하지만 충실하게 준비해주셨다.
1인분 스키야키. 옆 사람 눈치보지 않고 내 먹을만큼만 먹을 수 있다. 그야말로 일본 스타일.
일본 지방을 여행다니면서 치자케(知酒), 즉 그 지방의 향토술을 먹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다테야마에서 난 재료로 만든 니혼슈.


음식도 맛있었다. 사실 이런 분위기에서 먹는데 뭔들 맛이 없으랴만 말이다. 스키야키니 생선구이니, 식당에 가서 개별 메뉴로 주문해 먹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집밥 스타일로 한 상 차려서 나오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그런데 다섯시 반부터가 식사시간인데, 여섯시 십오분쯤 되자 하나둘씩 자리를 비운다. 다 먹고 나가는 사람도 있고, 먹다가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있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는걸까. 물어보니, 노을을 보러 나간다고 한다. 필자도 서둘러 남은 밥을 뜨고는 일행과 함께 노을 보러 나가는 행렬에 동참해 본다.


숙소 앞 노을 명당에 모여드는 사람들.


나가보니 숙소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이 산장의 숙박객이 아니면 굳이 와볼만한 장소가 아니어서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한참 전부터 삼각대를 세워놓고 노을 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필자 일행이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셀카도 찍고 꺄르르 웃고 있으니, 삼각대를 세워놓고 있던 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도야마현 출신으로 지금은 교토에서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단다. 출신이 도야마다 보니, 계절마다 두세번씩 날씨 좋은 날이면 도야마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작품사진을 찍어 올리고 있다고.


사진작가 아저씨는 사진에 문외한인 우리들에게 사진찍기 좋은 구도를 보여주고, 해가 지평선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눈밭에 붉은빛이 충분히 물드는 시점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알려주신다. 끄덕끄덕 하고는 그 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우리 근처에 모인 사람들이 열 몇 명 정도나 될까. 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함께 추위를 견디는 사이가 되니 까닭모를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숨이 턱 막히게 아름다웠던 노을 풍경. 이 날 도야마 출신의 전문 사진작가 아저씨를 만났는데,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미리 발자국을 만들어뒀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만난, '그 순간'.


위 사진 한 컷을 찍고 나서는 더 이상 사진찍을 마음이 들지 않아 멍하니 붉은빛을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또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설원 위 붉은빛이 타들어가듯 아름다웠다.


지평선 너머로 천천히 떨어지는 태양이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하는 것 같았고, 이 시간이 지나지 않기를 바라보지만 지나고보니 순식간이었다.


노을지기 전 산장 입구.


노을이 다 지자 이 아름다운 시간을 우연히 함께 보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뜬다. 사진작가 아저씨가 또 다른 팁을 준다. 9시 이후에 별 보러 나와보라고. 산장에서 5분만 걸어가도 불빛이 없어 별이 쏟아질 것 처럼 예쁠거라고.


그 말을 듣고 졸린 눈을 비비며 밤 9시경에 밤하늘을 보러 나왔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눈부시게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필자의 아이폰으로는 도무지 사진으로 옮길 수 없었지만, 아마 사진작가 아저씨라면 멋진 사진으로 남겨놓지 않았을까.


내내 도시에서 나고 자라 별자리라면 책에서나 본 게 다다. 그 선명한 천구를 보고도 북두칠성밖에는 찾질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다음날 아침식사. 도야마현에서 난 야채로 만든 샐러드와 갓 구운 빵, 커피까지 소박하지만 알찬 한 상이다.


이 곳의 아침식사는 6시반부터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산 아래서랑 비교하면 아침도 저녁도 두 시간씩은 빨리 주는 것 같다. 그래도 전날 일찍부터 푹 자둔 덕에 어렵지 않게 잠이 깼다. 어제 노을 보다 만났던 사람들을 아침에 다시 보게 되어 눈인사도 해 보고. 후후. 재밌다.




여행에서 숙소는 어떤 의미일까.


필자는 20대 후반 이후로는 여행갈 때 웬만하면 호텔을 이용하는 편이다. 예산 때문에 비즈니스 호텔로 예약하게 될지라도, 잠을 잘 때만은 호텔 프론트에서 매뉴얼대로의 응대를 받고 잘 정리된 객실에서 우리 일행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니즈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여행을 갈 때나, 이번 도야마에서처럼 호텔이 마땅치 않은 경우에는 호텔 이외의 숙소를 이용할 기회가 생긴다. 장점이 있다면 역시 숙박시설 주인과의, 그리고 다른 여행객과의 스킨십이 아닐까. 마치 일행처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해 지는 풍경을 구경하고, 공용식당에서 아침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알게모르게 같은 여행객으로서의 공감대를 느끼는 것. 서로 대화를 하게 되든 그렇지 않든, 호텔에서의 밍숭맹숭한 눈 마주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숙소 예약을 잘 한 덕분에 지친 몸도 쉬이고, 정성 담긴 식사는 물론 노을과 별 구경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알펜루트 여행기를 마치며, 관련글은 고부치자와에서 묵었던 민숙(民宿) 이야기로 달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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