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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Apr 23. 2018

도쿄의 심야 북카페를 소개합니다.

오래된 책 더미 속에서 책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공간, 모리의 도서실.

도쿄의 심야 북카페, 모리의 도서실(森の図書室)에 다녀왔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시부야역에 내려 어찌어찌 맞는 출구를 찾아 나와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GPS는 분명 도착했다고 하는데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인근을 몇 번 빙빙 돌던 끝에 겨우 모리(森, 숲이라는 뜻)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도 어디가 입구인지 몰라 어리버리하던 중, 다행히 내 뒤에 다른 손님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는 마치 가정집에 초대받아 가는 것처럼 인터폰으로 스태프를 불러 안에서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 도무지 문처럼 안 생긴 나무벽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드디어 내부가 나타났다.



아, 나 어렸을 적 꿈꾸던 아지트가 현실에 나타난다면 딱 이런 분위기였을 것 같다. 안쪽의 바(Bar)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벽면을 책꽂이로 꾸며놓았다. 나무질감을 충분히 활용한 인테리어에 은은한 조명까지,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 여기에 벽면을 따라 삼삼오오 테이블을 깔아놓고,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뒷편으로 커다란 가죽소파가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공간을 기획한 모리 슌스케(森俊介)도 1년에 책을 200권 넘게 읽는 책벌레라고 한다. (본인 같은) 책벌레를 위한 심야 북카페를 만들고 싶어요, 라는 기획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올려보았는데 한 달 만에 목표액에 100배에 달하는 금액이 모였다고. 이거 원, 글을 올린 본인도 놀라지 않았을까. 그게 어느덧 4년 전, 2014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왜 서점이 아니라 도서실 형태로 꾸몄을까? "저라면 천엔 이천엔 내고 책 사는 게 부담스럽지 않지만, 평소에 책 읽는 습관이 없는 분들에게는 그조차도 허들이 높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예 무료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모리 슌스케, 2017년 츠타야서점이 발간하는 티사이트 매거진(T-Site Magazine)과의 인터뷰(링크)에서)



처음에는 슌스케씨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책 천 권 정도로 시작했고 지금은 오천 권 정도 책이 있다고 한다. 새 책은 거의 없고 한 권 한 권 나보다 먼저 읽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있다. 아예 읽고 난 감상을 다음 읽을 사람 보라고 끼워넣을 수 있게 간단한 메모지가 준비되어 있기도 하다. 대략 픽션과 논픽션, 역사, 아동 등 주제별로 꽂혀있기는 하지만 도서관처럼 엄밀하게 분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조금 더 추천하고 싶은 책은 책등이 아니라 전면이 보이게 꽂아놓기도 한다. 여러모로 정리 잘 안 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와 책꽂이를 구경하는 느낌이다.


책을 애지중지하는 친구에게 책을 빌리면 활짝 펼쳐놓고 읽기도 눈치보이고, 뭐라도 묻으면 안 되니까 조심조심하게 된다. 편안하지 않다. 반면에 모리의 도서실은 그러지 말라고 아예 낡은 책을 가져다놓았고, 한참 읽다가 어디서 꺼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엉뚱한 데 꽂아넣어도 별로 티 나지 않을만큼 분류도 제멋대로라 (나처럼) 평소 부주의한 사람을 더 편안하게 해 준다.



이게 끝이 아니다. 모리의 도서실은 북카페를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커뮤니티 스페이스로 진화중이다. 모두의 독서회(みなの図書会)라는 이름으로 2주에 한 번씩 진행하는 독서회가 그 중심이다.


https://www.facebook.com/events/173882883402022/?ti=icl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독서회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 좋을까? 공통의 책을 한 권 정해놓고 그 책을 미리 읽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 책을 읽기 어려워질 수도 있고, 평소에 책 읽는 습관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책 한 권 다 읽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모두의 독서회'는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5~6명씩 조를 짜 주고 책을 고를 시간을 준다. 다들 10분 남짓 책꽂이를 둘러보며 평소 좋아하는 책이나, 최근에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을 골라온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자기가 고른 책을 소개한다. 평소에 책을 잘 안 읽는다며 쑥쓰러워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각자 관심사와 관점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냥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각자 관심사가 다 다르다. 그리고 그 관심사에 대해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다르다. 언젠가 읽어보고 싶었어요 도 충분하지만, 이미 다 읽고 <출발, 비디오 여행>을 연상시키는 말투로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소개해주는 것도 괜찮다. 서툴든 능숙하든 모임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일부일뿐이다.


'모두의 독서회'에 한 번 참가하려면 우리 돈으로 4만원이나 되는 참가비를 내야 한다. 그래도 선착순으로 매번 2~30명이나 되는 참가신청을 받고 있는데다가, 이번주로 어느덧 92회째를 맞는다고 한다. 독서회에 참가하고자 모리의 도서실에 왔다가 단골이 되는 손님, 모리의 도서실에 단골로 와서 매번 책을 읽다가 독서회에도 참가해보겠다는 손님... 공간과 커뮤니티의 선순환 구조다.


이 날 '모두의 독서회'에서 추천받은 책. 표지가 예뻐서 찍어보았다.


우리는 도시에서 때로는 고독을, 때로는 연결을 추구한다. 책은 바라보기에 따라 고독에도 연결에도 쓸모가 있다. 책에 고개를 묻고 책 속 세계에 집중하면 고독으로, 잠시 고개를 들어 책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연결로도 갈 수 있다.


책의 이런 쓸모를 잘 이해하고 똑똑하게 구현해 놓은 이 곳 모리의 도서실. 이 곳에서 완전히 여유를 찾았건만 나무문을 열고 나와 시부야역으로 돌아가니 다시 시끌벅적한 도심 한복판이다. 그래도 도심 한복판에서 고작 몇 걸음 걸어 이만한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도시생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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