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집밥을 좀 해 먹는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내가 밥 해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놀란다. 네가? 요리를? 2~3년 전까지만 해도 김치찌개 한 번 끓여본 적 없던 나, 지금도 뭐 솜씨는 그저 그렇지만 그래도 내 입맛에는 맛있는 집밥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진보는 결핍에서 온다.
나는 제대로 된 식재료 하나 갖춰두지 않은 채 1년을 버티다가, 사 먹는 음식에 물리기도 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울며 겨자먹기로 밥 해먹기를 시작했다. 딱히 일본음식이 입맛에 안 맞았던 건 아니다. 한국처럼 밥이 주식이고, (한국 간장과 묘하게 맛은 다르지만 그래도) 익숙한 간장 베이스가 많으니 그럭저럭 입에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거의 매끼를 식당 또는 테이크아웃으로 해결하다 보니 분명 메뉴는 다른데 맛은 그 맛이 그 맛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그래서 집밥으로 돌아왔다. 바다의 짠맛에 익숙해져 있다가도 강을 거슬러 민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그렇게 내게 좀 더 익숙한 맛으로.
사부의 비밀
집밥을 해먹기로 결심하고 제일 먼저 엄마를 일본 집에 초대했다. 엄마는 커다란 캐리어에 온갖 식재료를 다 이고지고 비장하게 나타났다. 지퍼백과 비닐봉지에 꽁꽁 싸매여 우리 집 냉장고에 데뷔한 한식의 기본 식재료 - 다진마늘, 고춧가루, 참깨, 다시마 등등. 뭐 여기 한인마트에 가면 웬만한 건 다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베테랑 엄마가 엄마 입맛에 맞는 - 그리고 내가 어려서부터 우리집에서 줄곧 먹어 온 - 익숙한 식재료를 쏙쏙 집어 가져다 준 게 나름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사부님 짐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었다. 다담 된장찌개 양념, 백종원의 매운 양념장, 그리고 연두해요~ 연두해요~ 까지. 그간 우리 집은 조미료 안 쓴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있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쩐지... 최근 몇 년 사이에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가 그 전보다 맛있어졌더라니...
사부님 말에 의하면 미원이나 다시다는 소위 조미료맛이 너무 강한 데 비해, 다담이나 백종원, 연두는 살짝만 넣어주면 조미료맛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을 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은 바에 의하면, 반반 정도 비율이 제일 무난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라면 일반적인 된장 반, 다담 양념 반. 제육볶음이라면 고추장, 간장, 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을 섞어 기본 양념장을 만들고, 거기에 백종원 양념을 곁들여 주면 맛이 밋밋하지 않고 맛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 다담 넣으니 맛있었다며 다담만 100% 넣고 찌개를 끓이면 자극적이고 텁텁한 찌개가 됐다.
집밥에는 조금은 희미한 레시피가 어울린다
"엄마, 나 소고기 무국 끓이는 방법 알려줘."
"끓는물에 소고기를 잘게 썰어서 넣은 다음에, 국물이 좀 우러나왔다 싶으면 무를 넣어. 그 담에 파랑 마늘 소금 후추로 간을 해. 연두 조금 넣어도 돼. 그 담에 두부를 넣고, 조금 더 끓이면 돼."
엄마의 레시피는 늘 이런식이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똑 부러지는 레시피와 엄마가 알려주는 희미한 레시피 사이에 뭔가 답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소고기는 어떤 부위를 사야 하는지, 무는 어떤 크기로 써는 게 좋은지, 파랑 마늘 소금 후추는 각각 어느 정도로 넣으면 좋은지 등등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다행히 네이버 블로그와 달리 엄마는 카톡하면 곧 읽고 답장 해 주니까 궁금한 건 다 물어본다. 웬만한 걸 다 답해주다가도 "그래서 얼마나 넣으라고?"라는 질문에 부딪히면 버퍼링이 걸린다. 그걸 무슨 일일이 세면서 하냐고 한다. 대충 적당히 넣으라고.
처음엔 그 대답이 너무 막막하게 들렸는데, 자꾸 해먹다보니까 어느샌가 내게도 "대충 적당히"에 대한 감이 생겨나는 것도 같다. 이유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만드는 음식과 달리 엄마가 만드는 음식은 이미 숱하게 먹어봤던 거기 때문이다. 집에서 먹던 때의 국물 색깔, 맛,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에서 꺼내보며 퍼즐을 맞추면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정도 비슷하게 음식이 완성된다.
이런 재미를 나 개인적으로는 레시피에 신경쓰지 않게 된 다음에 느낄 수 있게 됐다. 각자 성격에 따라 다른 부분일텐데, 내 경우에는 뭐든지 다른 사람 말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소고기 무국은 내가 워낙 좋아해 여러 번 끓여먹다 보니 이제는 엄마가 처음에 보내 준 카톡을 찾아보지 않고도 슥슥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요리하는 시간 동안 그야말로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묘하게 힐링이 된다. 만드는 것도 먹는것도 편안한, 진짜 집밥이 된 것이다.
한식과 김치
그 전에 나는 김치 없이도 잘 사는 편이었다. 한국에 다녀오는 길 공항에서 100g짜리 꼬마김치 10개 들이를 사 가지고 오면 두고두고 두 달은 먹었다. 물론 와인에도 마리아쥬가 있듯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반찬이 있어, 가령 라면을 먹을 때면 김치 생각이 나게 되니 그럴때나 꺼내다가 조금 깨작대는 정도였다.
지금은? 어휴, 김치 없는 냉장고를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김치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떻냐면, 예를 들어 파스타랑 김치를 먹는 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떡볶이랑 김치도 마찬가지다. 파스타는 피클, 떡볶이는 단무지랑 먹는 게 좋다. 그러니까 매 끼니 파스타나 떡볶이 같은 음식을 해 먹으며 산다면 김치 없이 사는것도 상상 못할 일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흰 쌀밥에 국이랑 반찬을 차려놓고 한식 집밥을 먹을 땐 김치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배추의 시원한 맛, 양념의 매콤한 맛, 발효되어 새콤하고 살짝 신 듯한 맛. 이 맛이 있어야 한식 한 상이 완성된다.
그런데 왜, 내 집밥은 한식일까?
10년 전 일인데, 스웨덴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헝가리 친구가 스톡홀름 교외에 있는 자기 할머니 집에 나를 데리고 가 줬다. 그 집에서 얻어먹은 음식은 스웨덴 집밥에 가까울지, 헝가리 집밥에 가까울지.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리코타 치즈를 넣어 파스타를 만들고, 그걸 오븐에 구워서 내 주셨는데, 그 때 기억을 떠올리면 그 때 그 맛이 내 혀 끝에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만큼 맛있는 파스타를 먹어본 적이 없다. 그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10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의 얼굴보다 친구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파스타 맛이 더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파스타랑 비슷한 무언가를 찾으려고 꽤나 노력했지만, 솔직히 그 음식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걸 일반적인 식당에서 파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포기했다. 스웨덴에 사는 헝가리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스웨덴 또는 헝가리 집밥.
이 얘기를 왜 하냐면, 나는 여태 짧게나마 여러 나라에 살아보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그 나라의 '집밥'을 충분히 경험해 본 것 같지는 않아서다. 가령 2년이나 일본에 살다보니 이제는 일본의 어느 식당에 가서 어느 메뉴를 주문해야 할지 감이 빠삭하지만, 정작 일본 사람들이 집에서 뭘 먹는지는 잘 모르겠다. 음, 흰 쌀밥에 낫또를 올려먹으려나?
반면 한식에 대해서는 알게모르게 아주 풍부한 배리에이션을 경험해왔다.
된장찌개만 해도 얼마나 그 종류가 다양한가. 멸치국물, 바지락, 소고기, 돼지고기 등등 취향에 따라 국물내는 방법이 다 다르고, 고춧가루를 넣느냐 마느냐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고, 또 부재료로 넣는 야채는 어떤 걸 고를지 등등. 세상의 모든 된장찌개를 다 먹어본 건 물론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배리에이션을 경험해 보고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걸 취사선택 해서 집밥을 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한식 한 상을 차려먹는다. 맛있으면 맛있는대로, 맛없으면 맛없는대로 잘 먹는다. 좀 맛없게 된 날도 있지만, 슈퍼에서 재료를 골라 씻고 다듬고 잘라서 요리하는 모든 과정을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맛보다 애정으로 먹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