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사태 해제 이후의 도쿄를 돌아본다.
4월 초부터 5월 말까지, 두 달 가까이 계속되던 긴급사태가 드디어 해제되었다.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그간 문을 닫아걸고 있던 카페, 식당, 쇼핑몰, 미술관 등등이 차례로 문을 열 것이다.
이 놈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본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 당장은 반도 영향이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본다. 도쿄는 지금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거주자 1인으로서 내 짧은 경험과 생각을 적어본다.
그 회사의 파산
지난 5월 중순, 레나운이라는 암호같은 이름이 뉴스에 등장했다. 새로운 코로나 치료제 후보인가 하며 클릭해보니 그건 아니고, 역사 깊은 패션기업의 이름이었다. 이 기업의 포트폴리오 중 그나마 내가 이름을 아는 브랜드는 아놀드 파마 정도.
레나운은 일본경제가 한참 승승장구하던 1990년대에는 세계 패션기업 중 최고 매출을 기록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간 버블붕괴, 글로벌 금융위기 등 여러 변곡점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어찌어찌 버텨왔다고 한다.
그런 기업이 코로나를 못 버티고 파산신청을 했으니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놀랄만한 일이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그 정도 크기의 상장기업이 파산절차를 밟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다. 2019년 1월 이후 첫 사례라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유일한 사례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든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에 따른 일본 경제 구조조정의 첫 신호탄이 될지도.
그 도쿄올림픽 굿즈는
얼마 전 우편함에 신문사에서 홍보물을 넣어놓고 갔다. 홍보물에 적힌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어주기도 귀찮아서 읽지도 않고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 날은 유독 큰 글씨로 "엄청난 혜택"이라고 적혀있길래 좀 관심이 가서 읽어줬다. 그 엄청난 혜택이라는 것의 정체(?)를 알고 나자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신문을 구독하면 도쿄올림픽 굿즈를 공짜로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와우.
올림픽 굿즈라는 게 말하자면 시즌 상품 아닌가. 올림픽 직전까지 조금씩 가치가 올라가다가, 올림픽 기간 중 그 가치가 최고조에 달하고, (2018년 평창올림픽 당시 수호랑과 반다비 굿즈는 품귀현상을 겪어 프리미엄이 붙기도 했다.) 올림픽이 끝나면 서서히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그런.
도쿄올림픽은 전례없는 1년 연기가 결정되면서 올림픽 굿즈의 일반적인 가치 싸이클을 적용하기가 어려운 상품이 됐다. 분명한 건, 2020년 5월 지금 이 순간 도쿄올림픽 굿즈의 가치는 글쎄, 신문사 입장에서 신문에 덤핑으로 묶어서 떠넘기고 싶을 정도로 떨어졌다는 거다.
그나저나 지금 상황이 이리 된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뻔뻔스럽게도 독자에게 "엄청난 혜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굿즈를 떠넘기기로 하다니. 한국에서 그런 짓 하다가 SNS에 잘못 바이럴 되면 아주 그냥 난리난리 날텐데. 모 신문사의 대담한 마케팅 전략에 놀란 순간이었다.
카레 한 그릇 먹으러 갔다가
긴자에 내가 좋아하는 카레 가게가 있다. 메인거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골목 지하에 있어서 자칫 못 보고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머리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내려가면 1946년에 창업했다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걸어놓은 아기자기한 노포가 나타난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나무 테이블에 레드를 포인트 색으로 활용한 지난 세기풍의 소품까지, 딱 경양식에 잘 어울리는 인테리어를 해 둔 가게다.
메뉴는 카레 하나. 밥의 종류(백미 또는 잡곡밥)와 밥의 양(보통 또는 많이) 정도를 고를 수 있다. 다 고르고 나면 멋진 그릇에 밥이랑 카레, 계란 후라이, 반찬을 다 얹어서 숟가락이랑 준다. 덮밥 스타일의 카레다. 젓가락 같은 건 없다. 카레랑 반찬이랑 같이 숟가락으로 떠서 먹으면 된다. 여기 카레는 서양식(?)으로 루를 만들어서 식감이 꾸덕하면서 진한 맛이 난다. 반숙계란을 터뜨려서 밥이랑 비벼먹으면 아주 그냥...
아, 잠깐 글이 딴데로 샜다. 며칠 전 문득 이 가게가 생각이 났다. 긴급사태 선언이 끝났으니 슬슬 문 열었겠지 싶어서 부지런히 걸어 가 보았다. 다행히 문을 열어서 지하로 조심조심 내려가 보았으나 이게 웬걸, 가게에 사장님 혼자뿐이다. 12시면 나름 피크타임인데도 말이다.
결국 카레 한 그릇 다 먹을때까지 가게에 홀로 앉아 사장님 한탄을 들었다. 긴급사태 선언으로 긴자에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 날이 계속되었지만 월세 나가는 게 무서워서라도 가게를 닫을수는 없었다고 했다. 물론 결과는 매달 적자. 이대로는 얼마 못 버티고 가게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주부터 긴급사태 선언이 끝났으니 부디 긴자 거리에 사람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서너달 뒤가 궁금해진다. 1946년부터 여러 부침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긴자에서 영업을 이어왔던 이 가게, 과연 2021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세입자를 모집합니다
요즘 길을 걷다보면 불 꺼진 점포에 "세입자를 모집합니다"라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부동산 경기가 좋을때는 목 좋은 자리에 점포를 뺀다고 하면 그 자리에 들어오겠다는 가게가 많으니까 굳이 대대적으로 세입자 모집 공고를 붙여두지 않고도 가게 자리를 넘겨줄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런 공고가 자꾸 눈에 띈다는 건 부동산 경기가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도쿄는 도쿄올림픽이라는 거대 이벤트를 앞두고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대형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도쿄역 리노베이션 공사와 마루노우치 주요 건물들의 리모델링 공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차근차근 준비해 온 시점에 드디어 도달한 올해 초,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도쿄의 부동산 업자들은 "아, 요즘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오르고 있어서요"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어떨까? 얘기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해 초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급 가구점의 폐점세일
카레 먹고 걸어오는데 오오츠카 가구가 폐점세일을 하고 있다는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무려 10층짜리 건물에 싸게 팔아넘겨야 하는 물건이 가득 차 있다. 오오츠카 가구의 자체 상품은 크게는 6~70%까지 할인이 되고, 편집샵 형태로 소싱해 온 수입 고가브랜드의 그릇이나 스피커, 인테리어 소품 등은 1~30% 선에서 할인한다는 모양이었다.
일본에서 오오츠카 가구가 어떤 정도 위치인지, 나도 사실 잘 모른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막연히 '비싼 가구'의 예시로 거론되는 걸 여러 번 들은적이 있어서 아 좀 비싼 가구 브랜드인가보구나 했던 정도다.
조금 찾아보니, 1969년 창립 이래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어 회원 가입이 되어있지 않으면 돈이 있어도 가구를 살 수 없게 운영이 되어왔다고 한다. 가구를 사기 위한 회원권이라니. 신기한 개념이다. 최근 몇년 간 경영권을 두고 창업주 가족 사이의 분쟁이 있어서 회사 경영 자체가 순탄치 않았다고 하니 뭐 꼭 코로나 때문에 폐점 세일을 하는 상황은 아닐수도 있을 것 같다. 올해 초에는 야마다 전기라는 가전제품 유통회사에 인수가 되어서 점포정리를 포함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던 중이었다고.
이유야 어쨌든 시기가 시기이다보니 긴자 한복판에서, 그것도 콧대 높기로 유명하던 고급 가구점에서 고급 가구에 빨간 스티커를 붙여 파는 풍경 자체가 신기하게 보였다. 할인된 가격이라고는 하는데 나 참, 할인 가격을 제대로 계산한 게 맞는지 싶을 정도로 여전히 비싸서 뭘 사지는 못하고 나왔지만 말이다.
그래도, 깨어나는 거리
긴급사태 발령으로 두 달 가까이 울며 겨자먹기로 휴업 해 온 업장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고있다. 극히 소수지만 월요일 저녁 긴급사태 해제 기자회견이 있자마자 바로 다음날인 화요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곳도 있고, 이번주 주말을 기점으로 영업을 재개한다는 곳이 꽤 많은 것 같고, 늦어도 다음주 평일 중에는 대부분 가게가 다시 문을 연다는 것 같다.
매장 입구를 몇 군데로 줄여놓고 입구에서 체온측정, 마스크 착용 체크, 손 소독 요청을 한다든지, 방명록 식으로 방문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놓게 한다든지 등등 가게마다 나름대로 감염방지 대책을 세우고 있다. 정부 가이드라인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되게 애매하게 써있을텐데, 그 애매한 가이드라인을 보고 각 가게 상황에 맞게 적용하느라 회의 많이 했겠다 정도의 감상이다.
어쨌든 그간 잠들어있던 거리가 깨어나고 있다.
예전에 북유럽에서 교환학생으로 생활할 때 일이다. 긴 겨울이 가고 3월 말쯤 드디어 해가 길어지고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 때 거리를 거닐면 "겨울에 봤던 그 사람들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 표정이 눈에띄게 밝아져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하루에 해가 뜬 시간이 서너시간도 안 되는 혹독하고 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으니 기분 좋을만도 했겠지?
지금 일본의 거리를 보면서도 그 때 북유럽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 마스크에 페이스 쉴드, 손 소독제까지 온갖 방역용품에 둘러싸여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거리에 나올 수 있어 즐거워보이기도 한다.
뭐, 내가 즐거운 마음에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투영해서 보는 걸 수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일본, 다섯 번째 이야기를 마친다. 이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땐 이 사태가 이 정도로 오래 지속될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쩌면 내 예상보다 더 길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긴급사태 선언이 발령되던 날에 쓴 글을 관련글로 달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