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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Mar 22. 2020

미술관에서 소장품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내가 좋아하는 도쿄의 미술관 2편, 국립신미술관

롯본기에서 아오야마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 딱 봐도 비싸보이는 쇼핑몰과 크고 작은 식당들을 지나쳐 걷다보면 이 곳이 등장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계절마다 각 계절에 어울리게 잘 관리된 정원, 통유리와 곡선으로 요약될 법한 정갈한 3층 건축물이 관람객을 반긴다. 국립신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전시기획이 늘 흥미롭다는 점을 꼭 이야기해야겠다.


구체적으로 재작년의 '루브르 초상화 전'을 예로 들어 이야기해보자.

전시 제목이 '루브르 미술관 전'인 것과, '루브르 초상화 전'인 것은 아주 다르다.


전자는 뭐랄까 좀 심심하다. 관람객 입장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가야할지도 알 수 없고, 전시를 감상하고 나서도 별로 놀랄 게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루브르 미술관에 안 가본 사람이라면 뭐 한 번쯤 시간 내서 가볼만도 하겠지만, 이미 가 본 사람이라면 뭐 굳이 가 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반면 '루브르 초상화 전'은 좀 다르다. 루브르 미술관이 얼마나 큰가. 실제로 가 보았다고는 해도 그 큰 미술관에서 연대별로 대표작품을 감상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테마별로 큐레이팅 된 작품을 볼 기회는 많지 않다. 게다가 초상화라니. 적어도 내게는 미지의 영역이랄까, 굳이 초상화만 찾아서 볼 일이 없었던 영역이다. 이 전시를 기획한 사람들은 초상화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던 걸까? 전시를 기획한 사람들이 내게 던질 질문을 곱씹으며 미술관에 가고, 전시를 감상하면서도 질문에 답을 찾으며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재작년에 다녀 온 루브르 초상화전. 전시 내용도 너무 좋았고, 하나의 테마로 쭉 감정이입하며 감상하다 보니 하이라이트인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에 다다라서는 눈물까지 찔끔 났다.





국립신미술관이 전시기획을 통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는 미술관의 특징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 정도 규모의 미술관치고는 특이하게 자체 컬렉션이 '하나도' 없다는 점 말이다.


내 짧은 생각에 미술관을 만들려면 일단 자체 컬렉션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모을수도 있고, 특정 시대나 또는 화풍의 작품을 모을수도 있고, 또는 국가나 대부호가 어마어마한 자본력으로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모을수도 있지만, 어쨌든 자체 컬렉션이 없이 미술관을 만들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는 사립이 아닌 국립 미술관이라서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국립신미술관은 스스로 완결된 '점'이 되기보다는 '점'을 잇는 '선', 나아가 점과 선이 모이는 허브로 기능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도쿄 도내의 다른 국립 미술관들이 '서양'이라든가 '현대' 같은 테마에 종속되어 있다면, 국립신미술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새로운' 것이라면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술관에 가 보면 매번 2~3개 정도의 전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데, 굵직굵직한 기획전과 함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 수상작을 전시한다든지, 일본의 젊은 작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국립신미술관에는 Art Shop도 두 군데나 있다. 기획전의 주요 작품을 테마로 제작한 기념품도 물론 있지만, 미술과 관련이 있는 다양한 디자인 상품들도 취급한다.





작년에는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이라는 제목으로 럭셔리 시계/쥬얼리 브랜드인 까르띠에에 대한 전시도 열렸다. 인상적인 전시였다. 현존하는 브랜드에 대한 전시라는 데서 일방적인 찬사만 늘어놓으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완전히 기우였다. 단순히 '유럽의 보석은 아름답네요'로 끝나지 않고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 특히 일본의 전통과 까르띠에를 연결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국립신미술관에서는 이 전시를 위해 신소재연구소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건축설계 사무소에 전시회장 구성을 맡겼다고 한다. 신소재연구소는 현대미술 작가 둘이 주축이 되어 만든 곳으로, 현대 건축물에 쓰이는 자재들이 철저하게 규격화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고대와 중세, 근대에 쓰이던 소재를 재발굴하려는 시도를 하는 곳이라고. 실제로 전시회장의 구성 하나하나가 작품과 공간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을 반영하고 있어서 좋았다.


까르띠에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미스터리 클락을 보여주는 전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미스터리 클락은 기계가 하는 일이 마술처럼 느껴지던 근대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물건이다. 정교한 설계로 시계 무브먼트를 살짝 숨겨버려서, 투명한 수정판 위에 시계바늘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이게 다 귀족들의 유희였던 만큼 눈이 부시게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보석이 아닌 시계 본체다. 그래서 반짝임을 강조하는 직접 조명보다는 은은하게 전체를 보여주는 간접 조명이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교토의 한 장인이 만든 와시(和紙, 일본 전통 종이)를 활용했다는 설명과 함께, 시계의 12분할에 착안해서 천장에서 빛이 부드럽게 내리쬐도록 12개의 베일을 설치 해 작품을 전시해놓았다.


그 외에도 이 전시에 재미있는 포인트가 많았지만 여기까지만 적어본다. 까르띠에전을 언급한 이유는, 이 전시를 통해 국립신미술관만의 특별한 아이덴티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도의 허브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수시로 미술에 대한 워크샵, 세미나, 교육 등의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 과정에서 쌓인 네트워크, 도출된 아이디어들을 전시 기획에 반영한다. 나아가 미술관 밖의 전문가와 적극적으로 협업해서 전시를 구성한다.


자체 컬렉션이 없다는 게 미술관으로서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자체 컬렉션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어떤' 전시여야 한다는 데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아차, 국립신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건축을 빼 놓을 수 없다. 겉에서 보기보다 안에 들어와 봤을 때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멋진 공간이다. 전체 벽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다른 조명 없이도 실내를 넉넉하게 밝혀준다. 여기에 3층 높이의 뒤집어진 원뿔 구조물과 여기저기 파도치듯 부드럽게 휘어진 곡선까지 더해져 한 번 만나면 쉽게 잊을 수 없을만큼 기억에 남는 공간 경험을 준다.


이 곳의 또 다른 장점, 공짜로 앉아있을 자리가 많다. 전시 보고 나와서 잠시 앉아있고 싶은 마음이 들면, 사람 많은 카페에서 불편하게 있느니 그냥 아무데나 앉아 햇살을 쬔다.





글을 쓰는 김에 올해는 어떤 전시가 에정되어 있는지 훑어보았다. 1949년부터 현재까지 일본에서 유행한 패션을 통해 유행과 사회상을 돌아본다는 전시가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버블경제 전후로 어떤 패션이 유행했는지가 궁금하다. 사회와 경제 곳곳에 풍요가 흔하디 흔하게 넘쳐났던 그 시절.


가을쯤에는 바티칸 미술관과 협력해서 카라바조 기획전이 게획되어 있다고 한다. 오, 인기가 엄청날 것 같은 예감이다. 카라바조도 카라바조지만 그보다는 바티칸 미술관과의 콜라보를 강조해 마케팅 하지 않을까 싶다. 모네나 베르메르 전에 갔다가 깔려죽기 일보 직전의 경험을 했던 게 새록새록 떠오른다. 음, 이런 전시는 가능하면 하루 휴가를 내거나 해서 평일 낮 시간에 가는 게 좋겠지?


아, 즐거운 상상이다.


참고로 국립신미술관도 지금은 기약없이 휴관 중이다. 아무 일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 그립다. 주말에 마음 놓고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하루하루가 지겹지만, 이런 때일수록 안심하지 말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미술관에 대한 글을 쓰는 걸로 미술관에 가고 싶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며,

내가 좋아하는 도쿄의 미술관 2편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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